풍수

통일 한국의 수도

수미심 2016. 3. 26. 20:53

통일 한국의 수도,

 

南과 北 지근거리에 있는

 

바닷가 처녀지 찾아야

  •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입력 : 2012.02.11 03:07 | 수정 : 2012.02.12 15:32

풍수에서 말하는 ‘4해(四海)의 주작’ 영종도엔 매일 수많은 비행기가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천하대세란 나누어짐이 오래가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짐이 오래가면 반드시 나누어진다(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는 문장으로 소설 '삼국지'는 시작한다. 남한과 북한도 언젠가 다시 합쳐진다. 시간문제이다.

통일 한국의 수도는 어디가 마땅할까? '관습법'으로 보면 당연히 서울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두 가지 관점에서 서울이 통일 수도가 되기 어렵다.

첫째, 평양을 자기네 수도로 하였던 북한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서울을 통일 수도로 삼는다면 이는 남과 북 지역 갈등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천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에도 신라와 백제의 고토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듯.

둘째, 서울은 이미 극도의 포화 상태다.

통일 후 북한 주민들이 서울로 대거 유입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새로운 통일국가에 새로운 수도가 필요하다. 풍수적으로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줄 때 남과 북의 민심은 하나가 되고, 통일 한국은 세계 강국이 된다.

첫째, 남과 북, 특히 서울과 평양에 가까운 거리로서 개발이 안 된 처녀지여야 한다. 둘째, 나라를 더욱더 풍요롭게 하면서 동시에 큰 인물들을 배출해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강은 천리가 안 되고, 들도 백리가 되지 않는다(江不千里, 野不百里)'. 그러한 까닭에 큰 민족을 길러낼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럴까? 우리 민족의 선지자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사'에서 '풍수설'을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다음은 함석헌 선생의 우리나라 지세론이다.

'반도의 지세를 보면 큰 민족을 길러낼 수 없다. 넓은 들이 없다. 큰 민족이 되려면 그것을 기를 만한 들이 있어야 한다. 들도 없지만 큰 냇물도 없다. 큰 민족을 길러내기에 조건이 맞지 않는 땅이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항구가 많다는 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쓸모없는 항구와 해안선을 살려내는 것이 우리 일이다. 땅이 살아나면 사람도 살아난다. 산천 정기를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 받아야 한다'.

문제는 남과 북이 모두 지근 거리에 있으면서 바닷가 처녀지를 찾되 산천 정기가 오롯이 모인 땅이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앞의 글들에서 "1한(一漢), 2하(二河), 3강(三江), 4해(四海)"를 언급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떠돌던 참언이자 당시 조선 지관들의 '수도론'이었다. '1한'은 한양(서울), '2하'는 교하, '3강'은 강화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미래 통일 수도는 '1한, 2하, 3강'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북한 주민들까지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 땅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4해'는 '남해(南海)'를 가리킨다. '남해'는 여러 비결서에 등장하는 전설의 땅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지도자(진인·眞人)가 출현할 것이라는 전설이다. 함석헌 선생도 미래 우리나라는 "뿌리를 북원(만주)에 박고 꽃을 남해에 피우자"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남해'는 그러한 전설의 땅이 아니다. 조선 초기 45년간 여섯 임금을 섬기며 '동국여지승람'이란 지리지를 편찬하기도 한 문신(文臣)이 서거정이다. 그는 "남해제도(南海諸島)"라는 말에 이어서 "동쪽으로 삼각산 봉우리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강화도가 두르고 있다"고 하여 '이곳'을 특징(特徵)하였다. 훗날 이야기이지만 실제 '이곳' 남쪽에 영종도 국제공항이 들어섰다. 풍수상 영종도는 '이곳'의 주작(朱雀: 붉은 새)에 해당한다. 풍수고전 [금낭경]에서 주작은 '날아올라 춤추는 모습(상무·翔舞)'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영종도에는 매일 수많은 비행기가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이곳'을 중심으로 강 건너 북한 땅까지 포함하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제 해상 도시를 만들 수 있다. 북의 예성정맥, 중앙의 한북정맥, 남의 한남정맥이 모이는 지점이다. 자세한 것은 다음에 다루되,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풍수적 문제점'이 '유비(流蜚)'되는 청와대 터와 엮어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산에 막힌 한양,

 

물길 따라 흐른 교토…

 

수도의 풍수는 國運을 바꿨다

  • 김두규·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2011.10.29 03:14 | 수정 : 2011.10.29 21:15

청룡·백호·현무·주작…

 

조선과 일본의 풍수학은 비슷해 보였지만 달랐다

'국운풍수'를 논하는 것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풍수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지난 회에 '우리 민족의 진정한 주산(主山)은 백두산이 아니라 중국의 의무려산'이라고 하였다. 풍수에서 주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나라의 주산은 그 민족의 발원처이자 중심축이다. 미래 우리 민족 '생활권(Lebensraum)'의 지향처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주산을 보면 한 집안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풍수지리가 크게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에서는 주산 개념이 약했다. 중심축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고려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외적(왜구·몽고·홍건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크게는 국가에서, 작게는 개인의 무덤까지 주산 개념이 명확해져갔다. 상대적으로 중앙정부 통제력과 영토개념이 더 분명해졌다.

국토관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서로 다른 국토관은 그 민족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준다. 국토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고려와 조선에서는 '땅을 보고 그 땅의 성격이나 하중 능력을 활용하는 기술'인 풍수가 국가의 관학(官學)이었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의 국토관은 당시의 풍수관에 의해 규정된다.

중요한 것은 고려와 조선의 풍수관이 달랐다는 점이다. 지관선발 고시과목이 달랐기 때문에 그로 인한 국토관의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국토관의 차이가 국가의 흥망성쇠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조선과 일본의 풍수관 수용을 보면 뚜렷해진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풍수서적은 11세기에 쓰인 '작정기(作庭記)'이다. 본디 정원을 만드는 지침서이지만 그 핵심 내용은 풍수이다. 이 책도 다른 풍수서적들과 마찬가지로 사신사(四神砂), 즉 청룡·백호·주작·현무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의 사신사 내용이 달랐다. 조선의 수도 한양(서울)의 사신사는 북악산(현무)·인왕산(백호)·낙산(청룡)·남산(주작)으로 모두 산이다. 이렇게 사방의 산을 내용으로 하는 조선의 사신사는 지기(地氣)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일본의 사신사는 산이 아니다. 현무는 언덕(丘), 백호는 큰길(大道), 청룡은 흐르는 강(流水), 주작은 연못(池)으로 상정한다. 예컨대 1000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京都)의 청룡은 가모가와(鴨川)라는 강, 백호는 산인도(山陰道)라는 큰길, 주작은 오구라이케(巨�c池)라는 큰 호수였다. 흐르는 강(청룡), 큰길(백호), 큰 연못(주작)은 수레와 크고 작은 배들이 다니는 통로가 된다. 화물의 운송, 교역, 상업, 조선업, 측량술, 토목기술 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사신사는 지기를 북돋워 배가시키는 기능을 한 것이다.

산을 중시하느냐(조선), 물을 중시하느냐(일본)에 따라 훗날 그 국가의 운명은 다른 길을 맞이한다. 일본은 16세기에 이미 유럽과 교역을 하였고(일정 기간 쇄국이 있었지만) 19세기 말엽이면 세계 해상강국이 된다. IMF 당시(김대중 대통령 당선 즈음)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그린스펀 총재를 배행하고 한국에 왔던 구자형 박사가 그때 했던 말이다. "19세기 말 일본과 조선의 GNP 비율이 10:1이었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세계 최강의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강과 바다를 재화를 운반하는 통로로 삼고, 큰길을 만들어 교통을 용이케 한 일본 풍수관의 결과였다. 이에 반해 조선은 끝까지 사방을 둘러싸는 산들을 사신사의 이상으로 여긴다. 은둔의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풍수 덕 볼 생각 마시오 자연과의 조화가 풍수 핵심"

 

광해군 때 교하천도 성공했다면

20년 뒤 '삼전도 굴욕'은 없었다

  •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입력 : 2011.12.10 03:11 | 수정 : 2011.12.11 06:16

나라의 건국 시조(태조)는 천 년 사직을 염두에 두고, 기업의 창업주는 500년 미래를 생각한다. 당연히 후손들이 딛고 일어서야 할 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생겨난 동아시아 터잡기 예술이 풍수다. 풍수(風水)는 문자 그대로 바람과 물이다. 바람은 잡을 수도 볼 수도 없어서 논하기 어렵다. 반면 물은 볼 수도 있거니와 만져볼 수도 있어 구체적이다. 지금까지 국운풍수를 논하면서 주로 물을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대 화두는 근대화(Modernization)였다. 세계 최빈국(最貧國)으로 북한보다 못살았던 남한을 '아시아의 새끼 호랑이'로 만들었다. 1908년 최남선이 주창하였던 한반도 맹호론(猛虎論)이 한갓 허풍이 아님을 역사로 보여준 것이다. 60여년 만의 일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화두는 세계화(Globalization)이다. 세계화란 전 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 시장이 되며 저마다 자국의 부를 늘려가고자 함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세계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4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에서 턱걸이를 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1868년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천도를 논의한다. 후보지로서 기존의 교토, 오사카, 에도(지금의 도쿄) 등이 떠오른다. 이때 정치인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 산조 사네토미(三���|美) 등은 '수운(水運)의 장래성, 뛰어난 지세(地勢), 국운의 흥성' 등을 이유로 에도(도쿄)를 관철시켰다. 오사카도 훌륭한 항구도시이기는 하나 큰 배가 드나들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그들이 말하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세계화'를 염두에 둔 천도였다.

산이 좋으면 인물이 좋고, 물이 좋으면 재물이 풍요로워진다. 그렇다고 물가라고 하여 모두 좋은 땅이 아니다. 물길이 감싸는 환포(環抱)의 땅이어야 한다. 1960년대 이후 도시화로 서울에 새로운 부촌(富村)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도를 놓고 보자. 한강의 물길이 감싸 도는 마포 서교동(1960년대)→여의도(1970년대)→용산(1980년대)→강남(1990년대)→광진구(2000년대) 순으로 부촌들이 형성된다. 반문할지 모른다.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의 중심지가 되었던 강북(江北)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크게 보면 한강이 강북을 환포하고 있다. 강북 가운데에서도 사대문 안이 중심지이다. 백제의 옛 수도 공주부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임시행정수도'(공주 장기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신행정수도'(현 세종시) 등도 모두 금강이 크게 환포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광해 임금 당시 교하천도론을 주장했던 지관 이의신의 안목은 탁월했다.

교하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지면서 완벽하게 환포를 해주는 땅이다.

교하천도를 통해 광해 임금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637년 우리 임금(인조)이 청나라 임금 앞에서

 '머리 박는 수모'(삼전도 굴욕)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교하가 새로운 수도로 적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번 글에서 광해 임금 때의 참언 '一漢, 二河, 三江, 四海'를 소개할 때 미래 '세계화'에 걸맞은 대한민국의 수도는 한양('1한')과 교하('2하')를 포함하되 '3강'과 '4해'를 선취(先取)하는 땅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3강'은 강화도를 말한다. 강화도는 고려 때 수도가 된 적도 있었고 조선에서도 중시되던 곳이다. 썰물 때에는 한강·예성강·임진강의 토사가, 밀물 때에는 조류성 운반물질이 이곳에 퇴적된다. 폭풍과 해일이 적고 용수 또한 풍부하다. 저절로 땅이 커지는 곳이다.

수도로서 서울의 외연이 확대되는 것은 필연이다. 확산의 방향이 중요하다. 서울, 교하, 김포 그리고 강화도가 중심축이 되는 미래 수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4해"는 어디일까? '4해'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땅이어야 한다. 다음 글에서 계속하기로 한다.

풍수에선 得水(득수)가 으뜸…

 

日, 바닷가로 수도 옮긴 뒤

 

승승장구

  •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입력 : 2011.11.12 02:59 | 수정 : 2011.11.13 08:27

바다는 무한한 정복욕과 모험심·용기 심어줘…

 

국민이 자유에 눈뜨게 해

풍수(風水)란 무엇인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다. '바람을 갈무리(藏風)하고 물을 얻는 것(得水)'이라고 풀이한다. 풍수 고전 '금낭경'은 "풍수의 법술은 물을 얻는 것(득수)이 으뜸이고 바람을 갈무리하는 것(장풍)은 그 다음"이라고 하여 물을 더 중시하였다. 왜 물을 얻는 것을 중시했을까?

조선 사대부들이 집터를 고를 때 지침서로 활용한 책이 '택리지'다. 이 책은 말한다. "물은 재록(財祿)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시내와 계곡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를 이어 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 왜 물이 재물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물자를 옮기는 데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한데, 물자를 옮기는 방법이 없으면 재물이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람을 갈무리하는 산과 재물의 통로가 되는 물을 두고 한반도와 일본이 서로 다른 풍수관(국토관)을 수용하였음을 지난 글에서 소개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사방의 산이 에워싸는 분지를 선호했다. 심지어 길조차 외적의 통로가 된다 하여 '길이 없으면 나라가 안전하다(無道則安全)'는 논리까지 폈던 조선이었다.

대지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 개개인에게 산이 중요한가 물이 중요한가는 각자의 인생관에 따른 선택의 문제다. 공자도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여 사람마다의 차이로 돌렸다. 그러나 한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지을 때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부국강병의 나라여야 굶주리지 않고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조선의 지배계층은 일본에 비하여 정확한 시대정신(Zeitgeist)을 읽어내지 못했다. 일본이 한반도로부터 풍수를 수용했음은 그들의 역사서 '일본서기'(8세기)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작금의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일본은 언제부터인가 우리와 다른 풍수관을 발전시켜나간다. 그들은 물길을 중심으로 하는 풍수관에 만족하지 않고 도읍지를 아예 산간 분지(아스카·나라·교토)에서 바닷가로 옮기려 했다. 무인정권(바쿠후·幕府)의 최고 실력자(쇼군·將軍)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거지인 오사카도 그렇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근거지로 삼았던 에도(지금의 도쿄)도 바닷가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근거지를 에도로 옮기면서 가장 먼저 상수도를 건설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마가와(玉川) 상수로서 길이가 40㎞가 넘는다. 이 덕분에 17세기 이후 에도는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풍수는 물을 얻는 것(得水)을 으뜸으로 한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은 '역사철학'에서 "대지의 아들로서 특정 민족의 유형과 성격은 그 지리적 위치의 자연유형(Naturtypus)에 따라 규정된다"고 했다. 자연유형은 3가지로 분류되는데, 고원(초원)·평야·해안지대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해안지대만이 무역을 발달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무한한 정복욕, 모험심, 용기, 지혜 등을 심어주어 궁극적으로 인간(시민)의 자유를 자각하게 해준다고 했다. 국가의 주요 활동 무대를 어디로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와 그 국민의 자유의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한 나라의 수도가 어디에 위치하느냐는 국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지계획'이란 암호명까지 써서 수도를 옮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신행정수도'를 충청도에 건설하려다 실패했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나라 도읍지와 국운과의 관계를 풍수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