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통령 천도론 무산으로
과천정부청사·세종시 등 '서얼'들이 태어나…
풍수의 핵심은 地氣 모이게 하는 것
지난번 글에서 청와대 터를 다루었다. 1000년 가까이 도읍지(궁궐) 역할을 하면서 우리 역사에 기여한 공로는 무시하고 불행한 일들만 들춰내는 세속의 야박함을 이야기하였다. 동시에 필자는 청와대 터가 그 용도를 다했다는 말로 마무리하였다. 왜 그럴까?
집무처 청와대를 떠나려고 했던 전직 대통령이 둘 있었다. 국운을 생각할 때 청와대를 옮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정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들이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의 수도 입지에 대한 고민은 진지했다. 그는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이 새로운 곳에 수도를 건설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고, 그 자신이 대덕 연구단지를 만들 때 그곳을 행정수도로 생각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러한 고민 끝에 1977년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긴급뉴스였지만 박 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구상한 일이었다. 그가 새로이 행정수도를 옮기고자 한 까닭은 인구집중, 국토의 불균형발전 등 복합적이었지만 북한의 사정거리 안에 서울이 들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기획단(단장·오원철)이 구성됐고, '백지계획'이란 암호 아래 준비가 진행되었다. 2년 후인 1979년 5월 대통령에게 최종안이 보고되었고, 재가를 받아 실행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충남 공주시 장기면 일대가 그 예정지였다. 그러나 1979년 대통령 서거와 함께 '백지계획'은 문자 그대로 백지화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2002년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는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충청권에 '신행정수도건설' 공약을 내세웠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신행정수도건설추진단(단장·이춘희)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행정수도 이전은 좌절되었다. 대신에 행정부처만 옮기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안'으로 축소·변경되어 지금의 세종시가 탄생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박 전 대통령이 잡은 공주 장기면과 지금의 세종시가 인접하면서 금강변에 자리한다는 점이다.
청와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던 두 대통령의 천도론이 무산되면서 '서얼'들이 태어났다.
과천정부청사, 대전정부청사, 세종시 그리고 혁신도시들이 그들이다.
이제 대통령 집무처만 경복궁 후원인 청와대에 남고 국가 중추기관들이 대부분 떠나게 된 셈이다.
국무총리실도 금년 말에 떠난다. 풍수의 핵심은 땅의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모이게 하는 것이다.
땅의 기운이란 것도 결국은 사람이 있음으로써 그 모이고 흩어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청와대는 그 용도가 다했다고 한 것은 사람이 흩어지고 기운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더 이야기가 필요하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청와대 터는 '신의 거처'
교회·성당 들어서면 좋아…
관악산 낀 과천청사도 대통령 집무실로 훌륭
지난번 글에서 청와대가 용도를 다했다고 한 것은 대통령만 남고 대부분의 행정부처가 세종시로 이전하기에 사람도 흩어지고 그에 따라 지기도 흩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중들은 떠나고 주지 스님 홀로 남는 꼴이다. 게다가 청와대 터는 경복궁 후원이었다. 홀로 남은 주지 스님이 산문을 폐쇄한 꼴이다. 권력을 움직이는 주요 건물의 공간배치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의회민주주의 국가인 만큼 국회가 중요하다. 국회 저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국회에 빈번하게 참석해야 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 홀로 오는 것이 아니라 보좌진과 실무진이 함께 움직인다. 이럴 바에는 국회를 세종시로 옮기는 것이 더 효과적인 공간배치가 될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최적의 인프라가 갖추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가 추세인 지금의 서울은 이미 '세계도시(global city)'가 되었다. 국내외 주요 행사들이 주로 서울에서 개최된다. 이를 위해 정부부처 책임자들은 청와대와 조율을 하면서 행사를 준비해야 한다. 세종시 말고 서울에 제2의 집무공간이 필요하다. 두 집 살림하는 꼴이다. 이렇게 흩어지는 기운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까?
풍수적 관점에서 두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경복궁을 대통령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또한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라 하였다. 광화문을 통해 당당하게 대통령과 관리들이 대통령궁으로 들어가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대통령과 사절들도 여기서 맞게 한다. 품격 있는 공간이 확보되면 그에 걸맞게 사람들이 채워진다. 청와대에만 들어가면 세상과 격리되어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은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원래 이곳 지명이 '숨은골(대은암동·大隱岩洞)'이었다는 것도 이 땅의 성격을 말해주는 단서가 될 것이다. 경복궁 앞문(광화문)과 뒷문(신무문)을 모두 열어 새 세상과 세계화에 부응하는 공간배치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안은 세종시로 이전하게 되면서 텅텅 비게 되는 과천정부청사를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으로 활용하는 안이다. 웅장한 관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아래에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이 들어선다면 경제 대국에 걸맞은 공간배치가 될 것이다. 특히 과천정부청사 옆의 '중앙공무원교육원'은 별다른 보수 공사 없이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로 활용할 수 있다. 수도를 옮기지 않고 대통령의 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말많은 청와대 터…
좋은 땅도 역사가 길면
험한 꼴 당할 수밖에
과연 그러한가?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는 절대 빈곤을 해결했다. 우리 생활수준도 이때 북한을 추월했다. 노태우 대통령 때는 올림픽을 치러 국력을 과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아 우리의 '국격'을 높였고,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서민 대통령으로서 대통령이 '제왕'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탄생시켰다. 근대화에서 민주화로 그리고 세계화로 우리나라는 진보해왔다. 대통령 개인의 불행이었으나 국가의 불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 풍수 타령인가? 풍수지리 없이 우리 역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 터 잡기에 풍수지리가 활용되었다. 지금의 청와대 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려 문종 때다. 1000년 전이다. 이후 풍수에 최고의 실력과 경험을 갖춘 장군, 승려, 술사(일관·日官)들이 앞다투어 이곳을 새로운 도읍지나 신궁(新宮)터로 추천했다. 당시 풍수지리는 군사지리면서 정치지리였다. 지기(地氣)가 다했으니 도읍지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의 뒤에는 권력 강화나 권력 쟁탈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사람도 오래 살다 보면 별 험한 꼴 다 보듯 좋은 땅도 역사가 길다 보면 험한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
경복궁(청와대 터 포함)에는 불행도 많았다. 단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의 패륜도 있었고,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불타 270여년 동안 잡초에 묻힌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것들만 보면 태종의 발언이 옳아 보인다. 서기 1404년 당시 임금 태종은
조준, 하륜 등 대신들과 당대 최고의 풍수사 이양달, 윤신달 등을 불러 이곳 터를 잘못 잡았음을 질책한다.
"내가 풍수책을 보니 '먼저 물을 보고 다음에 산을 보라'고 하였더라.
만약 풍수책을 참고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참고한다면 이곳은 물이 없는 땅이니 도읍이 불가함이 분명하다.
너희가 모두 풍수지리를 아는데,
처음 태상왕(이성계)을 따라 도읍을 정할 때 어찌 이 까닭을 말하지 않았는가." 맞는 말이다.
경복궁(청와대) 터에 물이 없는 것, 험한 바위가 보이는 것,
북서쪽(자하문)에 황천살(함몰처)이 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작 태종 본인은 이곳에 터를 잡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재위 시절에 국방과 중앙집권제도의 틀이 잡혔다. 세종은 우리 영토를 백두산까지 확장시켰다.
지금의 한반도 모습이 갖추어진 것도 이때였다. 또한 한글이 만들어졌다.
우리 문자를 만듦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자기의식'을 갖게 했다.
우리 민족사에 이보다 더 큰 업적이 또 있을까.
청와대 터가 좋다는 말인가 나쁘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청와대 터는 이미 그 용도가 다했다. 다음에 계속하기로 한다.
이제 장례 방식은 중요하지 않아… 조상과 氣 공유하면 그것으로 충분
세속의 술사들은 좋은 땅에 묻어야 후손이 번창한다지만,
화장이든 심지어 미라든 氣만 통하면 돼
이 시대의 대표적 학승(學僧)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 스님 이야기이다.
스님의 고향은 포항시 청하면 유계리이다. 스님의 부모는 원래 유계리 678번지에 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아홉 살의 맏아들이 죽자 큰 시름에 잠기었다.
그때 "옥녀직조(玉女織造)형의 명당으로 집터를 옮기면 후손이 융성하리라"고 어느 풍수가 조언을 하였다.
그 말을 따라 유계리 107번지로 옮긴다. 집터를 옮긴 지 3년 만에 지관 스님이 태어난다. 어느 명풍수 였을까, 그 터를 잡아 준 사람은? 이후 출가한 스님은 고향을 찾지 않았다. 이승에서의 인연이 다하고 있음을 안 스님은 2010년 출가한 지 60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생가터는 남의 논이 되어 벼가 자라고 있었다.
스님은 이곳을 구입하여 보은탑(報恩塔)을 세우고 조부모와 부모님의 4기 묘를 화장하여 보은탑 밑에 모셨다. 조부모 및 부모 유골까지 화장하여 함께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지난 1월 초 지관 스님은 입적하였다.
요 두어 달 사이 남북한의 큰 지도자들이 연달아 별세하였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의 주검 처리 방식이 각각 달랐다. 지관 스님은 당연히 다비(불교식 화장)되었다. 지난번 글에 소개한 박태준 회장은 2001년 미국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전 '죽으면 화장하여 뼛가루를 포항제철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하였다고 하나 현충원에 매장되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미라로 안장되었다. 어찌 한민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장례를 치를까? 문화의 다양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가치관의 충돌은 아닐까? 물론 중국 고대 사상가 열자(列子)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별것 아닐지 모른다. 열자는 말한다:
"나 죽으면 그만이오.(…) 화장을 해도 좋고, 수장을 해도 좋고, 매장을 해도 좋고,
들판에 내던져도 좋고(…) 그저 그때 형편대로 하면 그만 아니오?"
그러나 죽어서 "개처럼 땅에 묻히기를 바라지 않는 것"(앙드레 베르제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지상정이다. 매장이든 화장이든 또는 미라든 저마다 '영생(永生)을 담보해준다'는 확고한 생사관에 근거한다. 유가적 관점에서 "돌아가신 부모를 화장하는 것은 당신들을 곧 하나의 물질처럼 취급하는 잔인함"(김기현 전북대 교수)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반면 육신을 화장함으로써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고 보는 불가의 관점에서 보면 한갓 지수화풍(地水火風)에 지나지 않는 육신을 길지에 매장하려는 행위 그 자체가 헛된 일이다. 그러나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는 유가나 불가나 별 차이가 없다. 우리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미라로 처리되는 상황이다. 영원히 사는 것도 영원히 죽는 것도 아닌 채 구천을 떠도는 '중음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그렇게 믿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의 미라처럼 김정일 위원장도 영원히 살아 자기 인민들을 지켜준다고 믿을 것이다.
풍수지리의 핵심이론은 조상의 기운과 후손의 기운이 서로 감응한다는 '동기감응(同氣感應)'설이다. 흔히 이것을 좋은 땅에만 조상을 묻으면 그 좋은 기운이 후손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으로 세속의 술사들은 풀이한다. 그럴 경우 풍수는 매장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만 수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조상과 후손 간의 상호감응은 그들이 공유하는 같은 기(同氣)에서 나온다.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북한 인민의 '어버이'가 되는 순간 북한 인민과는 동기가 형성된다. 돌아가신 조상에게 혼이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후손의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한 '확실한 믿음'은 '동기감응의 과정'을 거쳐 '명당발복의 결과'로 나타난다. 예수가 약 없이 병자를 고칠 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고 함과 같다. 나라가 더욱 흥하려면 그 나라 국민의 조상 혼령들도 편안해야 한다. 우리가 죽음의 세계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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