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雲鳥樓)
“타인능해(他人能解) 정신 이어갈 터”
'나눔'과 '배려'의 정신의 상징 ‘열린 쌀통’과 ‘낮은 굴뚝’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는 금환낙지(金環落地)형 명당으로 유명한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의미이며, 금환낙지(金環落地) 형상은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란 뜻이다. 운조루는 조선의 3대 길지 중 하나로, 1776년 정조 때 류이주(柳爾胄·1726~1797)가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아흔아홉 칸으로 짓게 된다. 운조루가 현세에 유명해진 것은 명당과 한옥 자체가 아니라, 곳간에 남아 있는 원통형 쌀 목독(木匵)과 바로 옆에 있는 큼지막한 사각형 쌀뒤주 때문이다.
이 쌀 목독 하단부에 동그란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 구멍을 여닫는 가로5cm, 세로10cm정도의 직사각형의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누구나 쌀뒤주를 마음대로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유 씨 집안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용도의 뒤주였다. 뒤주의 위치도 주인과 얼굴이 마주치지 않는 장소인 곳간채에 배치하였다. 쌀을 퍼가는 사람의 자존심에 대한 배려였다. 하단부의 ‘타인능해’ 마개를 열면 쌀이 쏟아진다. 운조루에서 지은 1년 논농사 소출의 약 20% 정도를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지출하였다. 이 집의 주인은 월말에 쌀뒤주를 검사하여 만약 쌀이 많이 남아 있으면, “덕을 베풀어야 집안이 오래간다. 당장에 이 쌀을 주변에 나눠줘라. 항상 그믐날에는 뒤주를 비우게 하라!”는 당부를 며느리에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인여천(事人如天)
운조루의 또다른 특징은 굴뚝에 있다. 운조루의 굴뚝은 유독 낮다. 양반집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누가 될까 염려해 낮게 지은 굴뚝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이 베어있다.
동학과 여순사건, 그리고 6·25때 좌익들의 주 활동공간이 지리산이다. 다른 부잣집들은 집이 불타고 그 집안사람들은 총에 맞거나 대창에 찔려 죽었지만 류 씨 집안은 죽은 사람이 없고 불타는 일도 없었다. 험난한 세월에 운조루를 지킨 건 이웃이었다. 이웃들은 누군가 해코지하려면 앞장서서 "이 집만은 안 된다"고 막아섰다. 운조루 사람들은 ‘복지(福祉)의 선구자’였다. 그 노고단 밑에 자리 잡은 운조루가 험한 풍파에도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쌀뒤주에서 나온 인심이 주변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풍수로 보는 운조루 연못
풍수에서는 ‘모자라는 곳을 도와서 채워준다’는 ‘비보(裨補)’라는 개념이 있다. 터가 너무 강한 곳은 석탑이나 석상(石像)을 세워서 눌러주고, 약한 곳은 땅을 돋우거나 나무를 심어 이를 보강하는 방법이다.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는 것도 비보풍수(裨補風水)의 한 가지 방법에 속한다. 풍수에서 집터를 감아 도는 임수(臨水)가 좋고, 배산(背山)이 좋다면 앞에 화체산(火體山)이 있더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집터를 잡는 경우가 있다. 구례의 운조루 터가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앞의 오봉산이 약간 화기가 있는 바위산이다. 그래서 운조루에는 대문 앞에 축대를 쌓아서 조성한 ‘비보연못’이 있다. 또 하나의 화재예방장치는 운조루 대문 앞을 흘러가는 당수(內堂水)라고 부르는 수로(水路)이다. 물론 집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이 연못과 수로의 물을 직접 퍼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서울 숭례문(崇禮門) 앞에도 비보용도로 파 놓았던 남지(南池)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연못이 메워지고 표석만 남아있다. 남지는 관악산(冠岳山)의 화기(火氣)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용도였다.
무려 239년의 세월을 견뎌온 운조루의 안주인 이길순 씨(82)는 문화류씨 9대 종부다. 입장료1000원 받기를 겸연쩍어하며,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가는 여행객을 그냥 모른 체 하기도 한다. 매표원이 됐다가, 들일하는 농사꾼도 됐다가, 운조루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해설사 역할도 한다. 이길순 종부는 “이 집터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 왔다”며 “선조들의 타인능해 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더욱 애 쓰겠다”고 말하였다. 운조루를 방문한 여행객들은 스치듯이 한옥의 겉모습만 볼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남겨 준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다.
류이주는 조선시대 성곽건축과 궁궐공사를 담당했던 무관이다. 류이주가 쌓은 성곽은 수원화성, 남한산성, 상담산성, 낙원읍성 등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 수 있는 건축물들이 많다. 류이주의 능력은 수원화성을 쌓은 후 너무 견고하고 아름답게 쌓아올려 임금이 완공기념 낙성연을 하사한 것만으로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천문지리(天文地理)에 정통하여 전국 팔도를 두루 돌며 명당 터를 보기도 했다. 무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나중에는 문관 정2품까지 오른 인물이다.
운조루의 10대 정신
1. 나눔과 베품의 積善精神 : 他人能解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행랑채에 백미 두가마니반이 들어가는 목독[쌀독]에 쌀을 담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사람이 쌀을 빼다가 끼니를 해결 할 수 있게 하였음. 그 마개에 타인능해라고 써놓았는데 누구나 마음대로 쌀독의 마개를 열 수 있다는 뜻임.
2. 분수에 맞는 生活精神 : 隨分室
아들이 기거하는 누마루에 ‘수분실’이라는 현판을 걸고 항상 자신의 분수에 맞는 생활태도를 갖도록 하였음.
3. 風流의 精神 : 時調 萬餘篇
조선 말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자살을 했던 매천 황현 같은 시인 묵객들과 더불어 문우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면서 대대로 써온 시조가 일 만 여 편에 달함.
4. 人間尊重의 精神 : 할머니 사랑방
남존여비의 유교적 사상이 팽배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안 사랑채를 동편에 건축하였음. 현재는 소실됨.
5. 記錄을 남기는 精神 : 百年동안의 日記
3대에 걸쳐 농가일기와 생활일기를 백 년 동안 기록하고 사회조직문서와 지세분정기를 자세히 기록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한눈에 파악 할 수 있게 하였음.
6. 善政을 베푸는 精神 : 樂安郡守
낙안군수로 재직 할 당시에 백성을 잘 보살피고 청빈하게 군수의 직무를 수행하고,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지로 행차할 때 모든 군민이 길거리에 나와 엎드려 울며 못 가게 붙들었다고 함. 그 당시에 공적비가 있었다하나 지금은 찾을 수가 없음.
7. 建築을 사랑한 精神 : 水原華城
수원 유수로 재직하면서 수원성을 쌓을 때에 정조의 마음이 흡족할 정도로 축성을 잘 하였다고 함. 당시에 신하들이 “성을 튼튼하게 쌓으면 되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정조는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였다고 함. 류이주는 축성의 공로를 인정받아 2계급 특진을 하였음.
8. 節槪를 굽히지 않은 선비精神 : 創氏改名反對
일본의 조선 문화말살정책의 일환이었던 성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하고 선비로서의 절개를 굳건히 지킴.
9. 父母와 祖上에 대한 孝道精神 : 제사지내는 일과 무덤 돌보는 일
일기의 내용을 보면 조상을 섬기고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인 점을 보면 대대로 효도를 다하였음을 알 수 있음.
10. 兼愛의 精神 : 굴뚝을 낮게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여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게 함.
[柳應敎 ㅡ 전북대 명예교수 공박. 시인. 柳爾胄의 8세손]에서 인용.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방문문의: 류맹효(010-9781-2533) 061)781-2644,
'풍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北김여정 종전선언 "좋은발상".. (0) | 2021.09.24 |
---|---|
[스크랩] 4. 태어날 태(台) (0) | 2018.10.25 |
[스크랩] ♣묘지주변에 심는 나무 ♣ (0) | 2017.11.13 |
[스크랩] 황소자리... 이야기... (0) | 2017.11.04 |
국회의사당 남근석 (0) | 2017.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