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한강변의 정자들

수미심 2016. 10. 31. 08:00

한강변의 정자들

망원정
한강대교에서 한강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양화대교가 나온다. 양화대교 밑에는 한강시민공원이 있고, 그곳에 한강변 최대의 명소로 꼽히던 망원정()이 있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별장을 지어 강상()의 풍경을 즐기던 곳이기도 했고, 태종이 어느 날 농사를 시찰하러 이 정자에 나왔을 때는 날이 가물던 중에 비가 흡족하게 쏟아졌다고 해서 희우정이라고도 하였다. 망원정이라는 이름은 성종 때 월산대군이 지은 것이다.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장이었던 망원정은 주변 풍광이 뛰어날 뿐 아니라 수륙 양군의 훈련장으로도 유명하였다. 망원정에는 병인양요로 혼쭐이 났던 대원군에 얽힌 일화가 몇 가지 남아 있다.

대원군은 외세에 대비하기 위한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아이디어를 현상 모집했는데 그때 채택된 것이 학우선()이라는 전투함이었다. 학의 깃털을 겹겹으로 하여 배를 만들면 가벼워서 오가는 데 빠를 뿐 아니라, 총포에 구멍이 뚫려도 선체가 깃털이라서 바로 수습돼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전국의 사냥꾼에게 명하여 학을 잡아 공출케 하였다. 깃털을 엮어 아교로 짓이겨 학우선을 만든 다음 이름을 비선()이라 짓고 망원정 앞에서 진수식을 가졌는데, 띄우자마자 물이 새서 배가 가라앉았고 배에 탔던 수군들을 구하느라 법석을 떨어야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대원군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서 한동안 고개를 못 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평양 대동강에서 소각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잔해가 그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대원군이 당시 야금술로 유명한 김기두라는 사람을 시켜 철갑선을 만들게 하였다. 기관은 제너럴셔먼호의 것을 쓰고 석탄이 없으므로 증기를 내는 연료는 목탄으로 대용케 하였다. 대원군이 망원정에 입석하고 국산 화륜선 진수식을 보기 위해 찾아온 수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을 붙이니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긴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1시간 동안 배는 10보 정도밖에 가지 못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강둑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대원군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망원정망원정은 조선시대에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던 명소 중 하나였다. 인근의 양화진은 조선시대에 한강을 건너 양천ㆍ김포 방향으로 나가는 큰 나루터였다.

압구정
오늘날 압구정동 산 310번지 3호 언덕에 그 터가 남아 있는 압구정()은 조선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가 건물을 짓고 명나라의 한림원 시강인 예겸이 이름을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누정’조에 실린 압구정에 대한 글을 보자.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두모포()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자의 이름을 한림학사 예겸에게 청하였더니, 예겸이 이름 짓기를 ‘압구’라 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에 또 사신으로 명나라로 들어가 조정 선비들에게 시를 청하였더니, 무정후 조보 등이 말하기를 “이분이 압구정 주인이다” 하고는 시를 지어보는데, 정자 이름이 마침내 중국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예겸이 압구정을 두고 기문을 지었다.

조선 왕성의 남쪽 십수 리에 강이 있는데 한강이라고 한다. 그 근원은 금강산, 오대산 두 산으로부터 나와 모여서 긴 강이 되고 서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내 옛날에 조서()를 받들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 강 위에 이르러 정자에 올라 잔치하며 시를 읊었고, 또 배를 강 가운데 띄우고 오르내리며 즐겼다. 그 강은 넓고 파도가 아득하여 바람에 돛이 펄럭이고, 갈매기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시원하고 경치가 다 황홀하여, 몸을 창해와 한수(), 면수(, 중국의 강 이름)의 사이에 둠과 같아서 내가 동방 조선에 머물러 있음을 잊어버렸다. (······)

내가 이름 짓기를 ‘압구’라 하고 이르기를 “갈매기는 물새의 한가한 존재다. 강이나 바다 가운데 빠졌다 떴다 하고 물가나 섬 위로 날아다닌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새가 아닌데 어찌 진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태로운 기미를 보면 바로 날아 떠오르고 공중을 날고 난 뒤에라야 내려앉으니, 새이면서 기미를 보는 것이 이 같은 까닭으로 옛날 해옹이 아침에 해상으로 나갈 적에 갈매기가 이르러 날아오는 수를 백으로 헤아린 것은 기심()이 없는 까닭이요, 붙들어 구경하고자 함에 미쳐서는 공중에서 춤추며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것은 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오직 기심이 없으면 갈매기도 자연히 서로 친하고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명회가 자신의 호를 짓고 수많은 사람들과 풍류를 즐겼던 압구정 때문에 이 일대에 압구정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풍경이 수려해 중국 사신들을 위한 연회가 열리던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한명회가 압구정이라는 화려한 정자를 짓고 그 경치를 감탄하는 현판들을 걸었는데, 그 현판들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었다.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조선의 빼어난 문장가였던 김시습이 압구정에 놀러가 이 현판을 들여다보고는 글씨를 다음과 같이 고쳐놓았다.

청춘에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김시습은 부()를 위()로, 와()자를 오()로 고쳤는데, 그 글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럴듯하다고 하였다. 나중에 와서 이 현판을 바라본 한명회는 결국 그 현판을 떼어내고 말았다.

세월 속에 압구정도 부침을 겪는다. 대한제국 말에는 개화파 정치인인 박영효가 소유했으나 그가 1884년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몰리면서 정자도 함께 파괴되었다. 1970년대 말 이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터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강남구는 한강 공공성 회복 사업으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재건축의 길이 열림에 따라 향후 아파트 재건축 시 압구정 복원을 적극 추진할 계획인데,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그림 두 점을 복원의 근거로 삼기로 하였다고 한다.

압구정 © 유철상갤러리아백화점이 들어선 압구정 인근. 주변에 로데오거리와 영화관, 패션몰 등 쇼핑타운이 조성되어 있어 서울의 유행을 선도하는 거리로 변했다.

제천정
용산구 한남동 537번지 일대에 있었던 제천정()은 조선시대 한강변에 위치했던 왕실 소유의 정자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사랑받았던 대표적인 정자 중 한 곳인 제천정은 세조 2년(1456)에 세워졌다. 세조 때부터 명종 18년(1563)에 이르기까지 한강변 정자 가운데서 왕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이곳은 경도십영()에도 있듯이 ‘제천완월()’이라 하여 달구경하기 좋은 곳으로도 꼽혔다. 광희문을 나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이나 정릉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다. 또 중국 사신이 오면 언제나 이 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

성종은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난 뒤 제천정에 자주 나와 정자의 규모가 작고 좁다 하여 이를 크게 고쳐 짓기도 하였다. 명종 13년(1558)에는 임금이 이 정자에 올라 수전()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인조가 왕대비와 함께 종묘와 사직단의 신주를 받들고 공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때 밤에 한강을 건너면서 제천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에 의지하여 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것으로 미루어 이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58년에 발행된 『서울명소고적』에 따르면 이 정자 건물은 청일전쟁 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그 후 왕실로부터 미국인 언더우드에게 불하하였는데 어느 틈에 없어졌는지 그 자리마저 황량하다고 기록하였다.

제천정의 풍경을 노래한 노사신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오랜 비 처음 개니 갠 빛도 좋을시고
누() 앞의 봄 물결 푸른 구름 뭉쳐 있다.
강 연기 막막하더니 바람 불어 걷히고
산안개 부슬부슬 새가 가지고 오네.
배는 비단 닻줄 끌며 꽃 핀 나루터로 돌아가고
술은 은하수 기울이듯 옥잔에 떨어지누나.
즐거운 모임 얼마인데 이별하기는 쉬운 것이
풍경 다시 보려고 배회하고 또 배회하네.

낙천정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 “낙천정()은 살곶이에 있다”라고 실려 있고, 변계량의 기문에는 “낙천정은 우리 주상전하가 때로 구경하고 노는 곳이다”라고 실려 있다. 낙천정은 조선 초기에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거처했던 곳으로, 세종 1년(1419) 2월에 상왕인 태종을 위해 지은 이궁에 딸린 정자가 있던 자리다.

정자가 세워진 곳은 주위보다 약간 높은 지대여서 대산(, 42.8m)이라 불렸는데, 그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아서 시리미산() 또는 발산()이라고도 하였다. 낙천정이라는 이름은 세종 때 좌의정 박은이 지어 바쳤다.

세종 1년 3월부터 9월까지 7개월 동안 상왕인 태종이 20여 회나 낙천정에 거동하였는데 그때마다 주연이 베풀어졌다. 그해 8월 대마도 정벌 때는 9도 절도()의 배 227척과 군사 1만 8천 명의 사열을 받기도 한 역사적인 건물이다. 태종이 세종 41년에 승하하자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 딸 정의공주에게 주었다. 그 후 성종 3년(1472)에는 국립양잠소 격인 동잠실로 사용하였고, 인조 원년(1623)에는 채소밭으로 사용했고, 관운장의 영정을 모셔놓고 어사각이라 한 적도 있었다.

현재의 낙천정은 1991년에 복원한 것으로 16층의 계단 위에 전면 3칸, 측면 2칸, 주심포, 팔작지붕의 형식을 갖추었으며, 계단 위아래에 해태 모양의 조각상이 사뿐히 얹혀 있다.

화양정
화양정()은 세종 때 말들이 떼지어 노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다. 뚝섬은 태조 때부터 말을 먹이는 곳이었으므로 세종은 재위 14년(1432)에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주서()』에 있는 “말을 화산 남쪽으로 돌려보낸다()”라는 구절의 뜻을 따서 화양정이라 이름 하였다.

한편 화양정은 ‘회행정()’이라고도 하는데, 그 연유는 단종과 명성황후와 관련이 있다. 세조 3년(1457)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다음 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월로 귀양 갈 때 화양정에서 전송을 하였는데, 단종은 “화양정, 화양정” 하고 중얼거리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회행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떠났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 원혼이나마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종 19년(1882)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변복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빠져나와 장호원으로 피난을 갈 때 광나루까지 가던 중 이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 갔다고 한다. 뒷날 명성황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화양정은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고 한다. 사각의 정자로, 기둥 둘레가 한아름이 넘었으며, 그 내부는 백여 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1년 7월 21일 낙뢰로 무너지고 말았고,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수령 650년이 넘는 고목을 비롯한 일곱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과 양성지의 「화양정시」만 남아 있다. 1987년에 서울시에서 표석을 설치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한가할 제 말 가는 대로 동성 밖을 나서니
저 멀리 들판 풍경 새롭고 산뜻하여라.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르기가 그린 눈썹 같고
비 내린 뒤 꽃 풀은 깔아놓은 푸른 방석 같구나.
꾀꼬리 오르락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 말 떼 부산하게 사방으로 흩어진다.
호탕한 봄바람 3월도 저무는데
술 들고 나와 좋은 경치 구경하기 알맞네.

천일정
고려시대의 절 터였던 곳에 세워진 천일정()은 개인 소유 정자였다. 성종 때 황희 정승의 손자사위인 의정공 김국광이 처음 정자를 지었으며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이 정자를 소유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하정 민영휘의 별장이 되었다.

천일정이라는 현판 휘호는 청나라 사람인 옹동화가 하정에게 써준 글씨이고,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의 『등왕각()』 서문에 나오는 “가을 물빛이 하늘빛과 함께 길다()”라는 시구에서 따서 지었다.

천일정은 천 평이나 되는 넓은 터에 동쪽으로 아늑한 안채가 있었고, 정남향으로 조금 높은 터에 청원당()이란 현판이 걸린 중사랑채가 있었으며, 그 남쪽으로 조금 낮은 강가 바깥사랑채에 천일정 현판이 걸려 있었다. 한강변 높은 곳에 축대를 쌓고 ‘ㄱ’ 자형 평면으로 배치하였으며, 앞쪽으로 돌출된 누각 아래로는 사각 장초석을 세웠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멀리 강 건너로 압구정이 바라보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에 맞아 무너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천일정의 자취는 한남대교 북단 UN 빌리지 쪽 한구석에 자그마한 표석으로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다.

 

천일정 터한남동 인근에 있던 천일정에는 추사가 쓴 청원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다리가 건설되면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외의 이름난 정자들
효사정(): 세종 때 건축된 정자로, 동작구 흑석동 한강변 효사정공원에 도로 때문에 깎아지른 언덕 위에 위태롭게 복원돼 있다. 이곳에 서면 올림픽대로와 한강을 잘 조망할 수 있다.

용양봉저정():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으로 행차할 때 한강을 건너 잠시 어가를 멈추었다는 정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한강대교 남단 동작구 본동사무소 뒤편에 남아 있지만 한강대교와 고가도로 때문에 시야가 막혀 있다.

심원정():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가 화전 교섭을 벌였다는 정자. 용산구 원효로 4가 용산구문화원 부근 언덕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소악루(): 강서구 가양동 궁산의 등산로 200미터를 걸어 올라가면 해발 75.8미터인 야산 위에 소악루가 세워져 있다. 시원스러운 한강 경치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 건너 난지도한강시민공원과 강변북로, 덕양산과 멀리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