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스크랩]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5

수미심 2016. 9. 2. 11:24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5

 

180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주제별이 아닌 년도순으로..


1951년 6월 5일 한강철교 임시 복구공사를 위한 발파 작업
ES42-1-320 TNT charges are used by men of the 453rd Engineer Construction Battalion, 8th
US Army, to blow rocks apart to enable float to maneuver between the two piers, as they repair
railroad bridge crossing the Han River, Seoul, Korea. 5 Jun 1951


1951년 6월 6일 한강철교 복구공사 (영문자대로 당시는 영등포 노량진 방향이다)
ES42-1-292 Last girder is raised into place on railroad bridge spanning the Han River, between
Seoul and Yongdungpo. 453rd Engineer Battalion EUSK reconstructed bridge. 6 Jun 1951


1951년 6월 12일 한강철교 임시 복구 개통식
ES41-2-21 Lt Gen James A. Van Fleet, CG US 8th Army, and LTC Barber, 453rd Eng Const Bn, 8th
US Army,
are amoung the first men riding the first test train across the newly reconstructed Han River
Railroad Bridge at
Seoul, Korea. 12 Jun 1951.


1954년 한강철교. 용산 서부이촌동쪽


1954년 한강 인도교. 한국동란 때 폭파된 다리를 임시 복구하여 통행하고 있는 모습
노들섬에서 바라본 모습. 건너편은 노량진 본동.


1954년 한강의 겨울. 인도교 아래에 얼음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1950년대 ​한강 얼음위의 잉어낚시꾼


1950년대 한강의 얼음낚시하는 사람들


1950년대 한강에서 얼음낚시.

1950년대 한강 중지도(노들섬) 유원지.
섬이라기 보다는 겨울철이나 갈수기 때와 장마철 이전엔 한강 북단인 이촌동에서 현재의
들섬
까지 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도 걸어서 백사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한강 인도
교의 철제 트러스가 군대 군대 없고 보조교각과 상판이 놓여있는 것을 봐선 휴전 이후와 복구공사
이전 모습으로 보인다.


1950년대 여의도와 비행장. 강북방향에서 항공기가 착륙하며 촬영한 사진

 
1955년 여의도 비행장 모습. 강북방향에서 항공기가 착륙하며 촬영한 사진

 


1955년 여의도 비행장민간항공기. 뒤쪽 날개에 중화민국(타이완)국기가 그려져 있다.

1955년 노들섬(중지도). 서울시사편찬위 제공
용산구 이촌동에서 인도교를 건너 노들섬(중지도)에 닿으면 아래로 계단이 있어 내려가면
유원지였는데 보트장과 수영복을 빌려주는 노점이 많았다. 앞에 보이는 언덕이 흑석동이다.


1950년대 압구정동의 겨울.
후일 70년대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자리,
한강 건너편의 금호동과 옥수동이 모습이 보인다.


1950년대 압구정동 모습은 전형적인 농촌마을 그대로다.
위의 사진과 각도와 철이 다를 뿐 같은 장소이다. 앞에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숲이 무성한 저 동
산에 조선시대에 압구정이란 정자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1956년 뚝섬유원지. 사진작가 한영수
한강은 여름이면 강수욕과 뱃놀이를 즐기던 휴식처였다. 그러나 보트장 옆에 W.C. 라고
적힌
화장실에서 알 수 있듯 이후 한강은 몸을 담글 수 없는 병든 강으로 변했다. 서울신문


​1956년 뚝섬의 물놀이


샤와(샤워) 냉수욕장. 강수욕장 인근의 샤워장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샤와 냉수욕장’이라는
표지판과
기업의 광고가 눈길을 끈다. 광고판에 붙어있는 성냥갑처럼 생긴 오리온 ‘루비
드롭프스(drops)
설탕에 과일즙이나 향료를 섞어서 졸여서 만든 사탕의 브랜드입니다.


샤워장 안쪽의 모습. 한강 강변에서의 물놀이를 즐긴 여성 두 명이 냉수샤워하고 있네요.


1956 이촌동과 노량진 부근에서 열린 한강 빙상대회. 겨울이면 한강은 스케이트 타는 사람 
들로 붐볐다. 덕수궁이나 창경궁 연못에서 스케이트와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렸고 아차산과
산에 스키장이 개설됐다.  서울시시사편찬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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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서울시사편찬위 자료에 따르면 아차산과 남산에 스키장 ?이... 전에 웹서핑 하다
서울 남산의 스키장이​라고 하는 사진을 스크랩하여 게시물을 만든적이 있는데 아차산에 관한 자
료는 볼 수 없고.. 의문점은 과연 남산에 스키장을 할만한 장소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가던 중 
그 장소로 추정되는 곳을 찾게 되어 궁금증이 풀리기도... 그중 몇개의 자료를 아래에 올립니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세우기 위해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사당을 인왕산으로 옮
겨버렸다.  조
선 태조 때 세워진 이 사당은 무학대사, 천산수(天山水)의 삼신, 태조 이성계 등을
모시던 호국사당이었다.
일제는 조선 신궁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조선의 신이 내려다 볼 수 없다며 사실상 쫒
아낸 것이다.  그리고 참배객들이 신궁으로 오르기 쉽게 나무를 베어내고 돌계단을 깔았다. 이것
이 바로 지금의 남산의 계단이다.

 
우리 역사에 관한 과거의 쓰라린 기록이지만 역사를 바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올려봅니다.
 

바로 이 일강점기 때의 엽서 사진에 그 답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일왕의 신사(신궁)가 후에 남산의 식물원(지금은 없어져버린)자리에 있었다.


위의 두 장의 사진을 볼 때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의 계단 부분이 해방 후에 스키장으로 활용된

터가 아닐까? 지형적으로나 주변 산세를 보면 위 사진 속 장소와 동일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계기로 일제시대 남산주변을 찍은 사진과 지도, 그 당시 사진엽서를 통해 19세기 말
이후 남산 북서쪽 기슭에 얽힌 짧은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1890년대 개항 이후 서울 내에 일본인 거주자가 많아지자 일본인의 편의를 위해 남산 북쪽 기슭 
일본인 거주지에 경성신사(京城神社)를 건립한다. 일본에서의 신사(神社)의 성격은 종교적인 개
념보
다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기 위한 한 방법이 전국 각지에 신사를 세우는 것이었다.  통감정

(統監政治) 이후 실질적인 통치권을 모두 일본에 빼앗기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강압 아

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韓日倂條約) 이후 1912년 메이지

(明治) 천황이 사망하자 천황 중심의 국가 통치이념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규모가 더 큰 신궁 건립

계획하게 되는데 여러 장소를 물색하던 중 한양공원 자리로 결정하게 된다.  조선신궁의 방

은 북서쪽을 향하는데 이는 자신들의 대륙 진출의 의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게시물 보기불편한 역사의 현장, 왜성대를 아십니까?  http://blog.naver.com/nahasa1/60177079250
조선 신사  http://blog.naver.com/nahasa1/60179619969  (나하사 네이버 블로그)

 

1920년 조선신궁 참배도로.
어딘지 짐작이 가시죠?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길을...

 
조선신궁을 오르는 계단에서 내려다 본 모습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전 지역에 신사(神社)를 설치하여 역대 일본 황실과

공로자들의 위패를 보관하고 철저하게 일본의 신민(臣民)으로서 강제로 참배하도록 하였다.

사진은 서울 남산에 설치했던 1930년대와 1940년대 신궁(神宮)의 모습이다. 일제 말기로 오면서

황민화(皇民化) 정책과 대동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남산 신은 일본 황실을 위한 숭배의 장소

신성시 되었고 얼마나 철저하게 우리 민족 말살 정책을 폈는지 알 수 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신궁은 헐리고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8.15해방 되자마자 국민의 손에
의해 바로 헐렸을 것이다. 초대 정부는 그 후 역사의 상흔을 지우기 위해서 조선신궁 터에 민
기의 상징인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사당(祠堂)을 세웠다. 이곳은 후에 남산공원으로 바뀌었다.

이 사진은 1959년 5월 국회의사당 기공식사진이다.

당시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던 부민회관 건물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국회는 남산에 국회의사

당 건립을 추진하던중 5.16혁명으로 중단되고... 이 자리에는 야외음악당과 어린이회관(1970년)

 

식물원이 들어선다.

1948년 남산의 스키장. 바로 이 모습인데 이곳을 남산 스키장이라고 했다. 이는 해방후 남산의
조선신궁을 오르는 계단과 신궁을 모두 철거한 자리가 경사로가 되어, 겨울이되자 눈이 내려

그 자리는 자연스레
슬로처럼 되었던 것인데 스키를 타기 적당하여 얼마동안 스키장이 되었
던 것을 남산 스키
장이라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왼쪽편에 어린이 회관이 건립된다)

 

 
서울시에서 발행한 서울소개 책자에 실린 사진으로 조선신궁있던 자리의 1970년대의

남산공원 모습이다. 남산식물원, 안중근 의사 사당, 당시의 어린이 회관(현재 건물은
그대로 있지만 능동의 어린이 대공원이 들어서자 그곳으로 어린이 회관은 이전했다.
 

1956년 한강. 스케이트 날 갈기


1956년 한강빙상대회 경기 모습


1957년 1월 3일 한강에서 얼음낚시


1957년 여의도와 비행장으로 가는 샛강의 다리


1957년 8월 27일 여의도 비행장의 쌍발기 앞의 스튜어디스들. 조선일보

 


1958년 4월 7일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모습


1957년 한강 주교(舟橋) 물결따라 출렁.

1958년 5월16일 복구된 한강 인도교를 보기위해 운집한 시민들


1958년 5월 16일 복구 준공된 한강 인도교. 한강대교라는 명칭이 등장
한강철교의 상부구조는 모두 트러스 형식이지만 1900년에 준공된 노량진 쪽 10경간은 단순
와랜(Warren) 트러스(7 panels), 용산 쪽 잔여구간은 강판형교로 구선되었고 1912년에 준공
된 상류의 동쪽 노선은 중앙 노선과 마찬가지로 노량진 쪽 10경간은 단순 와렌 트러스, 나머
지는 판형교로 구선되어 있고 1944년에 준공된 하류 서쪽 노선은 3경간 연속 더블 와렌 트러
스 3틀과 단순 트러스 1경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8년 5월 16일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준공.
한강 인도교는 제1한강교로 불리워 지다 한참 후에 한강대교로 개칭되었다. 


1958년 5월 16일 한강 인도교 복구준공식의 이승만 대통령


1958년 5월 16일 복구된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 서울시민과 경찰들

1958년 5월 한강 인도교 조명. 한강다리의 조명은 역사가 깊다.
일 강점기 때에도 다리 곳곳에 전등이 설치돼 야경이 좋았다고 하고, 해방 뒤에도 불을 밝히며
시민들을 맞아들였다.


1958년 7월 27일 복구 준공 후의 한강대교


1958년 9월 폭우로 물이 불어나 범람위기에 처한 한강과 위태하게 보이는 인도교.


1958년 한강과 한남동의 항공촬영 사진.
한강 이남의 현 강남구 신사동쪽은 모래톱으로 이루워진 백사장이 넓게 보이고 강폭이 좁아다.
보인다. 여름철 강수량이 많을땐 강의 폭도 늘어나게 된다. 왼쪽의 위가 남산이며, 중앙 산자락 
앞의 흰색 건물은 단국대학교 모습이고 오른쪽 강변 위의 동내가 UN빌리지, 오른쪽 옥수동쪽은
헐벗은 민둥산인데 당시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이런모습들이 흔하여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옥수동 오른편응 응봉동의 산인데 그곳은 바위산으로 지금도 드문
드문 개나리 나무 외에는 암장슬림으로 멀리서보면 민둥산처럼 보인다.

1958년 한남동 유엔빌지 앞쪽 한강변을 끼고 들어섯던 외인주택의 모습들

1958년의 뚝섬은 서울시민들에게 채소를 공급하던 경작지가 있었고, 유원지에는 미루나무 숲이
잘 조성된 유원지였다.

 


1958년 한강 철교 아래 얼름위를 자전거를 타고 있다.
목덜미에 견지대를 꼽고있는 것을 보니 얼음낚시 하러온 시민으로 보인다.
 

 

(50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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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향을 그리며...
글쓴이 : 한가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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