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스크랩]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6

수미심 2016. 9. 2. 11:25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6

 

18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주제별이 아닌 년도순으로..


50년대 한강의 얼음 채빙 모습을 한 곳에

 

1954년  한강의 채빙모습.
채빙한 얼음의 두께를 보면 결빙상태를 집작 할 수 있지요. 어린시절 남한강 유역에서 살았던
필자는 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더 두껍게 얼은 얼음을 본 기억이 있는데 삼판한 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이 한강의 얼음 위로 건너는 것을 여러번 보았고 우마차는 매년 겨울 얼음 위로 짐을

싣고 건너기도 했다.

 


1954년1월 한강에서 얼음채빙 후 휴식


1950년대 한강의 얼음채빙

한강에서 채빙한 얼음 싣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얼어버린 한강물을 톱으로 쓱싹 쓱싹 잘라서
소달구지에 싣고 여름에 먹을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서 서울 용산에 위치한 서빙고와 동빙고 등 
으로 향하고 있네요. 지금은 집마다 냉장고와 냉동실이 있지만 30여년 전
해도 제빙공장에서

만든 것을 얼음파는 가게에서 사왔었지요.

1958년 서울 한강의 채빙한 얼음


한강의 얼음을 채빙하는 모습


한강의 얼음 채취

 


1959년 2월 15일 한강의 채빙한 얼음을 운반하기위해 달구지에 싣고 있는 모습

 

서빙고 [西氷庫] 조선시대에 얼음의 채취·보존·출납을 맡아보던 관아. 

1396년(태조 5)에 동빙고와 함께 설치, 예조(禮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삼았다. 서빙고의 위치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파출소 근처였으며, 저장 얼음은 13만 4974정(丁)에 이르러 이
얼음은 궁중 내의 각 전(殿)과 관아에 공급하고 또한 백관(百官)에게 벼슬에 따라 차이를 두어 배급
하였다. 각 전에 나누어 주는 얼음은 궁중의 부엌에서 쓰였는데, 그 공급시기는 음력 2월부터 10월
까지, 관아에는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관원에게는 음력 6월 한 달 동안 배급하였다. 이 밖에
활인서(活人署)의 환자, 의금부(義禁府)의 죄수들에까지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서빙고는 동빙고와
함께 1896년(건양 1)에 폐지되었다.

동빙고 [東氷庫] 조선시대 얼음의 채취 ·보존 ·출납을 맡아본 관청.
1396년(태조 5) 동빙고 ·서빙고(西氷庫)를 설치, 이를 예조(禮曹)에 속하는 아문(衙門)으로 하였다.
동빙고의 위치는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당시 한강 연안의 두모포(豆毛浦)였으며, 이곳
에 저장 한 얼음은 나라의 제향(祭享)에 사용되었다.
얼음 두께가 4치 이상이 되어야 채빙(採氷)하고, 저빙량(貯氷量)은 1만 244정(丁)이다. 종묘(宗廟)
사직(社稷) 이하의 제사 때는 이곳에서 얼음을 공급하였는데, 그 시기는 음력 3월부터 10월 상강일
(霜降日)까지였다.  < 자료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1958년 한강 철교 아래의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이 폼을 잡고 있는 모습. 현재 이분들 70대가..

 


1959년 2월 23일 한강에서 썰매를 타고있는 소년.
썰매를 타고 있는 소년들 뒤로 한강 인도교 아치가 보인다. 얼어붙은 한강 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은 옛 자료를 보게되면 한강 인도교와
한강철교 사이 북쪽에는 겨울철엔 빙상장을 만들

어 놓아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 많았다. 무슨 시합이라도 열린게 아닐까 생각된다. 변변한

리가 없던 시절, 썰매 하나만 있으면 한겨울 추위도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950년대 말 한강의 황포돛배. 건너편은 반포지구


한강의 고기잡이배가 모여있는 곳. 그물을 펼쳐 매달아 말리는 모습


한강의 깨진 얼음을 아슬아슬하게 타는 소년들
 

한강에서 썰매타기 왼쪽은 얼음낚시


1959년 한강의 스케이트타기


1959년 한강에서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



1960년 서울 한강 배낚시

 

1960년 한강 인도교 모습. 남단은 현재의 노량진 본동, 다리 중간의 노들섬(중지도), 북단의

한강로 일대와 남산 모습이다


1960년대 겨울 한강의 풍경.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진


여의도 강변 한강철교가 뒤로 보이는 이곳은 여의도 강변.

 

가지런히 정박해 있는 작은 배들과 흰눈이 덮어있는 강의 모습이 고요하게 느껴지네요.

 


1960년대 한강 잠실 섬 U형 섬의 나루터

잠실은 원래 강북이었다
1520년 조선 중종 15년 한양 도성 일대에 큰 비가 내렸다. 며칠 퍼붓던 비가 잦아들자
한강변에 
나선 백성들은 기겁했다.  뽕나무가 우거진 잠실의 저지대 사이로 물길이
나버린 것이다.  잠실
남쪽으로 한강 본류가 흘렀고 그뒤 북쪽으로 작은 물줄기가 새로 생겨 졸지에 잠실은 섬이 되었
다. 한참 뒤에 물이 빠지고 다시 걸어서 강북 쪽으로 왕래를 하게 됐지만 비가 제법 내리면 잠실
은 섬의 신세가 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이 물길을 새로 생긴 냇물이라 해서 새내(지금의 신·
川)라 불렀다. 이후 400년 동안 사람들은 비가 많이 와서 육로가 막히면 뚝섬나루에서 배를 타
잠실에 뒤 다시 송파나루에서 배를 타고 성남으로 갔다.  가뭄 땐 고스란히 드러난 육로를
해 양쪽을 오갔다. 그러다가 또 한 번의 천재지변을 겪는다.

1925년 을축대홍수가  한강을 덮쳤다. 나흘 동안 500mm의 비가 내렸다. 호우로 불어난 물은 새
를 큰 물길로 바꿔놓았다. 잠실의 남쪽 한강 본류보다 몇 배 큰 물줄기가 북쪽에 생겼다. 평상
시에도 배를 타지 않고는 뚝섬에서 잠실로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상 새내(신천·新川)가 한강
본류된 셈이다. 그렇게 잠실은 영영 강북과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아직 잠실은 섬일 뿐 강남
문패를 달기엔 2%가 부족했다.
1971~73년 서울시는 한강에 제방을 쌓고 잠실 남쪽을 흐르던 옛 본류를 매립했다. 이로써 여의
도 3.5배에 이르는 새로운 육지가 생겼다.  중간에 오도가도 못하게 한강 물줄기는 석촌호수
남았다. 이때부터 잠실은 강남이 되었고 새 내는 명실상부한 한강의 본류가 되었다.
1960년대 한강(잠실)의 지도

1960년대 서강천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는 밤섬주민 멀리가 밤섬 모습이다

 

중지도 앞에서 뱃놀이하는 광경


1960년대. 한복 입고 파라솔에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노는 곁에서 ‘엄마 미소’를 품은 채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여전한 것 같네요.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복을 입고 계시다
는 정도인 같습니다. 한강변 모래밭에 꽂혀있는 파라솔이 멋스럽군요.


60년대 초, 한강의 인도교(제1한강교) 주변


수영복 튜브 대여하는 곳


꺅! 다 벗었어요 뭐니 뭐니 해도 강변에서 제일 신이 난 것은 아이들입니다. - 서울시
텀벙텀벙 물놀이를 즐기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그시절 한강에서의
물놀이 추억... 아름답게 간직하고 계시지요? 필자인 제 어린시절도 발가벗고 물놀이를 했습
니다. 그시절은 다 그랬지요.


대형천막을 치고... 자갈밭도 맨발로 잘 걷고 있네요.

내가 초콜릿 복근의 원조, 한강 강변의 모래사장의 인상파(?) 청소년들이 앉아있습니다.

요즘 아이돌의 필수아이템이라는 초콜릿 복근까지 갖추고 있네요. 나이아가라, 장미 등의

가게 이름들이 당시에는 세련된 것이었나 봅니다. 서울시 제공 

1960년대 광나루 백사장

1960년대 광나루 유원지 강수욕장. 보트에 '광나루5' 라는 글씨가 보인다

 


​한강변을 통해 가는 길이 지름길이기도.. 예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아낙들의 모습


중지도 보트장


보트를 세워놓은 곳은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엔 사진사들도 있기 마련...


한강으로 빨래하러 가는 행렬


강변에 나와 세탁을 하는 모습과 세탁물을 말리며 가족과 쉬는 모습이 한가롭기만하다.

한강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목을 축여주는 젖줄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한강물을 마실 수 없어서 팔당에서 물을
도 정수처리까지 해서 마시지만, 그때는 직접 한강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다. 귀찮아 하는
생을 데리고 강가에서 물을 길어가던 갈래머리 소녀에게 한강은 어떤 기억남아 있을까?
1960년대 한강의 중지도 모습. 당시만 해도 모래톱이 그대로 남아있어 서울 시민들의 휴식
공간 노릇을 했다. (이촌동 앞)

1960년대 중지도 유원지 모습. 각종 보트와 황포돛배 등이 향연을 벌이고 있습니다.

1961년 한강 인도교 윗쪽에서 물놀이하는 시민들


한강변의 ​얼음장수


1962년 마포강변 백사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들


1962년 5월 24일 마포강변 빨래터 풍경.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진


​1962년 한강 인도교 자살방지 안내판

1962년 인도교 주변의 한강 경비선. 건너편은 흑석동


1962년 한강에서 투망으로 물고기 잡는 사람들


1962. 8. 13. 제3한강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한남동에서 강남 신사동을 가는 가장빠른
길은 나룻배였다. 한강다리는 새 문명의 도래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사람을 싣고 강을 건너는 일반 나룻배보다 차마를 싣는 상당히 큰 배인데 아마도 서울은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을 것으로 보아 어떤 날에는 큰 찻배를 이용하고 지방과 달리 모터를
장착한 배가 아닐까 생각된다 (바로 옆에 나룻배도 보임). 그 이유는 지방에서처럼 삿대와 노
를 저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승선한 상태가 그 답이다. 1962년 당시 서울과 한수
이남을 드나들 수 있는 교량은 용산 - 노량진 간 한강철교 외에 남서쪽의 인도교와 동쪽의 광
루 다리뿐이었다.  교통수단이 지금처럼 많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었기에 웬만한 거리는 도
보로 이용했고, 먼 곳을 돌아 영동지구(강남)에 가는 것은 나룻배로 이용을 했을 것이다.
1960년대 강남 신사동쪽에서 출발한 나루배가 강북 한남동 나룻터를 향하고 있고 소형 고
잡이 배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우산을 쓰고있는 것으로 보아 비가 내리고 있고 강건너 강변 
(현 신사동, 포 일원)에는 여느 시골모습 처럼 미류나무가 늘어 서있는 모습 그대로다. 이 
배는 차마를 싣고 하는 배인데 사람을 태우고 강을 건너고 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앞의 접안하는 곳의 폭과 양을 보니 위의 찻배보다 더 넓고 큰배로 보인다. 

 

 

 

 

 

 

1962년 여름 뚝섬 유원지 숲에서 흥겨운 시간을 보내는 시민들

 

(
50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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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향을 그리며...
글쓴이 : 한가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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