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4
18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강의 모습인데 주제별이 아닌 년도순으로..
1947년 한강 인도교 위쪽의 채빙한 얼음을 실은 우마차가 빙판이 된 한강을 가고 있다.
1948년 인도교에서 바라본 한강철교
1949년 용산 조선총독관저 2층에서 본 한강. (현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1949년 용산 조선총독관저 2층에서 본 한강. (현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중앙 멀리 관악산과 오른쪽에 국립현충원이 들어선 서달산의 왼쪽 능선이 보인다.
1950년 전후.한강의 마포일대 전경. 원안은 조선시대 별영창 터.
항공사진인 것으로 보아 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로 추정
1949년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인 여의도 비행장 -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1910년대에는 일본이 간이비행장으로 사용하였고,1924년 정식으로 공항으로 승인되어 본격적
으로 운영 되었고, 1948년에는 군과 민간이 함께 비행장을 사용하였다.
1950년 여의도 비행장의 미군항공기. 좌측이 양말산
1950년 미군 뒤의 배경이 양말산(養馬山). 현 국회의사당 자리
6.26직전의 광나루다리. SBS 동영상 캡처
6.26직전의 광나루다리. SBS 동영상 캡처
[박정분/76세, 서울 광나루 사진 기증 시민 : (14살 때) 6.25 직전에 내가 그 사진을 찍었어요.
그때는 서울이 아니고 (고양이었어요.) 사진 속 그 다리는 일제시대에 일본 사람들이 놓은 다리
이고, 세 번째 놓은 다리죠, 지금 광진교는. 그때는 서울이 됐을 때일 거예요. 제가 15~16살 됐
을 때에요, 그 사진 찍은 건.]
광진교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8월 착공해 1936년 10월에 준공됐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한강
철교와 함께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가 1953년 복구됐고, 오랜 기간 사용하다 낙후돼 1984년 다리
가 주저앉기도 했다. 10년 이상 방치되다가 1997년 3월 같은 자리에 새로운 교량 공사를 착공해
2003년 11월 개통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5일 북괴의 기습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 되었고 그로부터 3일 후 적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 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서울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시민들은 용산과 노
량진을 잇는 한강인도교로 끝없이 몰려들었다. 북한군 탱크는 남침 이틀 만에 미아리 저지선을 넘
었다. '서울 사수(死守)'를 약속했던 대통령과 정부는 27일 새벽 남행 열차를 탔다. 당시 인도교는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단 하나의 다리였다. 4000여명의 사람과 차량이 뒤엉켜 한 발짝 떼기
도 힘들었던 02시 30분 무렵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인도교가 두 동강 나
고 그 위에 있던 사람과 차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시커먼 강물속으로 떨어졌다. 북한군의 추격 끊겠
다며 우리군이 TNT 3600파운드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정부도, 군도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량진을 잇는 한강인도교로 끝없이 몰려들었다. 북한군 탱크는 남침 이틀 만에 미아리 저지선을 넘
었다. '서울 사수(死守)'를 약속했던 대통령과 정부는 27일 새벽 남행 열차를 탔다. 당시 인도교는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단 하나의 다리였다. 4000여명의 사람과 차량이 뒤엉켜 한 발짝 떼기
도 힘들었던 02시 30분 무렵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인도교가 두 동강 나
고 그 위에 있던 사람과 차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시커먼 강물속으로 떨어졌다. 북한군의 추격 끊겠
다며 우리군이 TNT 3600파운드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정부도, 군도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살겠다는 일념으로 다리를 건너던 양민 500~800명이 까닭도 모른채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발발 사흘만에 남쪽으로 먼저 피난하고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한강대교 폭파
당시 서울의 한강에는 한강 인도교와 한강철교(철도교)가 걸려 있었다. 채병덕(蔡秉德) 총장은 적
의 서울 돌입 2시간 후에 이들 다리를 폭파하도록 공병감 崔昌植(최창식) 대령에게 명했다. 그러나
한강대교와 한강철교의 폭파에 있어서 한국군 주력의 후퇴 및 서울시민의 피난에 대해서는 고려되
있지 않았다. 李承晩 대통령은 6월27일 水原으로 피난했다. 6월28일 오전 2시경, 蔡 총장은 미아
리 방어선이 1시간 전에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하도록 崔 대
령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있지 않았다. 李承晩 대통령은 6월27일 水原으로 피난했다. 6월28일 오전 2시경, 蔡 총장은 미아
리 방어선이 1시간 전에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하도록 崔 대
령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그러나 그 직후 제5사단장 李應俊(이응준) 소장으로부터 “군의 주력도 서울시민도 아직 北岸(북안)
에 있는 상황에서 폭파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받은 蔡 총장은 폭파 연기 지시를 張昌國(장창국)
에 있는 상황에서 폭파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받은 蔡 총장은 폭파 연기 지시를 張昌國(장창국)
작전국장에게 주어 최창식 공병감에게 급행시켰다. 그 무렵 시내의 도로 곳곳은 피난민과 차량으로
매워져 張 국장의 지프는 좀처럼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張 국장이 궁지에 몰려 있을 때 한강대교
와 한강철교는 폭파되었다. 이때 시민·군인 등 500~800명과 그들을 태운 수십대의 차량들도 폭발
음과 함께 날려버리는 비극이 빚어졌다. 이렇게 자기 손으로 퇴로를 차단한 국군은 일거에 붕괴했
고, 150만 서울시민도 한강 北岸(북안)에 잔류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8일 폭파된 한강 인도교
1950년 6월 28일 한국전쟁으로 다리가 폭파되었고, 서울 수복 후 부교 또는 가교가 놓여졌다.
1957년 9월 시멘트와 철근을 이용한 공사가 착공되어 1958년 5월 15일에 준공되었다. 제1한
1957년 9월 시멘트와 철근을 이용한 공사가 착공되어 1958년 5월 15일에 준공되었다. 제1한
강교 라고도 불리었던 이 다리는 서울의 인구와 교통량이 크게 증가됨에 따라 새로운 다리가
필요하게 되자,1979년 1월 4일 다리의 폭을 20m에서 40m로 늘리는 확장공사에 착수,1981년
12월에 준공하였다. 그 결과 쌍둥이 교량으로 탈바꿈되면서, 이름도 ‘한강인도교’에서 ‘한강대
교(漢江大橋)’로 개칭되었다. <네이버 백과>
1950년 6월 28일 폭파된 한강 인도교
1950년 6월 28일 한강철교 폭파 장면
미 공군기가 1950년 7월 3일 한강 철교를 폭격하는 장면이다. (미 육군성 전사 자료)
1950. 6. 28. 한강철교를 폭파하는 장면. 이에 앞서 오른쪽에 육본 명령에 따라 국군에 의해
폭파돼 끊어진 한강 인도교 모습이 보인다.
1950년 6월 한국전 당시 작전상 아군에 의해 폭파하는 한강철교 좌)와 파괴된 철교 우)
1950년 6월 끊어진 한강철교
1950년 6월 끊어진 한강철교
1951년 1월 미 전투기에서 내려다본 부서진 한강철교 (왼쪽 철교 오른쪽 인도교)
1950년 6월 28일 새벽 군군이 서빙고 나루터에서 선박을 이용해 철수하고 있다.
1950년 6월 29일 한강선 이남(한강철교 남단)에서 방어하고 있는 국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한강철교를 건너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북한군 제105
전차여단의 소련제 T-34, T-85 전차
1950년 9월 23일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철교
1950년 9월 서울 수복을 앞두고 폭파된 한강철교 남단의 미군의 기관총 진지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눈앞에 둔 유엔군 전차부대가 지금의 강남 신사동 일대의
강변에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 미 해병대 촬영/유엔국참전협회제공
1950년 9월경 한국전쟁 당시 9.28수복전의 한강도하작전 전의 현 신사동 한강변 모래사장에서
한남동 방향을 바라본 모습인데 왼쪽 언덕은 현재의 한남2동 모습이고 11시 방향 멀리는 남산,
3시 방향의 언덕은 유엔빌리지가 있는 한남1동의 모습이다.
3시 방향의 언덕은 유엔빌리지가 있는 한남1동의 모습이다.
1950년 9월 25일 한강 도하작전
1950년 다리 아래 부교가 놓인 것을 볼 때 서울수복 이후로 추정
끊어진 한강 인도교.
1950년 한국전쟁시 여의비행장의 미군의 전투기
1950년 미군 수송기
1950년대 여의도 비행장 미군수송기
1950년 10월 19일 이승만 대통령과 프렌체스코 여사
ES210-13-16 Dr. Syngman Rhee, President, ROK, and Mrs. Rhee (foreground) with Non-commissioned
ES210-13-16 Dr. Syngman Rhee, President, ROK, and Mrs. Rhee (foreground) with Non-commissioned
officers of the 62nd Engineets and train crew members in front of the first locomotive to cross the newly
construdted railroad bridge spanning the Han River at Seoul, Korea. 19 Oct 1950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군차량들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1950년 12월 28일 아직 한강의 얼음이 튼튼하게 얼기 전이라 얼음위로 건널 수 없어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1950. 12. 28. 끊어진 한강 광진교 모습과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1950년 겨울 결빙이시작 되고 있는 한강, 6월 28일에 폭파된 한강 광나루다리.
1951년 1월 미 전투기에서 내려다본 부서진 한강다리들 (왼쪽 철교 오른쪽 인도교)
1951년 1.4후퇴 당시 얼아붙은 한강이지만 안전한 부교를 이용해 건너고 있다
50년 10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전선 사정이 좋지않아 연합군과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다 급기야는 적군이 서울 가까이 까지 다시 또내려왔다는 소식에 폭파되어버린
인도교 아래 부교로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1951년 1월 4일 부교를 건너는 미군 전차
ES41-6-56 (SC355548) A tank of the last UN Forces units in Seoul evacuated the city, withdrawing acro
ss the Han River on the remaining pontoon bridge which will be demolished as soon as they have
passed. 4 Jan 1951.
출처 : http://www.history.army.mil/photos/Korea/kwengin/brgdemo.htm
출처 : http://www.history.army.mil/photos/Korea/kwengin/brgdemo.htm
1951년 1월 4일 부교위의 美육군 리지웨이 장군
ES42-6-56 (SC355598) LT General Matthew B. Ridgway, CG, U.S. 8th Army (front row, left), and Co.
ES42-6-56 (SC355598) LT General Matthew B. Ridgway, CG, U.S. 8th Army (front row, left), and Co.
Itschner, Engineer, I Corps (front row, center), give the order to begin dismantling pontoon bridge after
the last of the UN Forces evacuated Seoul. 4 Jan 1951
1951년 1월 4일 부교를 건너는 피난민.
ES42-6-74 The last of the UN Forces having withdrawn across the Han River, U.S. Engineer
units dismantle and destroy the remaining pontoon bridges. 4 Jan 1951
출처 : http://www.history.army.mil/photos/Korea/kwengin/brgdemo.htm
1951년 1월 4일 1 .4 후퇴 당시 한강에 설치된 부교의 폭파장면
ES71-19-62 (SC356266) A Han River pontoon bridge out of Seoul, Korea, slowly burns and sinks
after the first charge of TNT has been set off by members of the 8th Engineer Battalion, 1st Cavalry
Division. 4 Jan 1951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과 이로 인한 전세의 반전 때문에 1951년 1월 4일 아군은 수도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후퇴하여야 했습니다. 이때 다시 한 번 한강에는 가설 교량
들을 파괴하는 폭발음과 섬광이 울려 퍼집니다. 다만 6개월 전과 달랐던 것은 안전하게 아군과 피
난민이 후퇴를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1951년 1월 4일 한강의 부교 폭파 장면
ES42-6-58 Evacuation of Seoul: After the last of the UN forces units have crossed the south bank,
men of US Eng. units got to work, first dismantling this pontoon bridge across the Han River, then
1951년 1월 4일 한강의 부교 폭파 장면
ES42-6-58 Evacuation of Seoul: After the last of the UN forces units have crossed the south bank,
men of US Eng. units got to work, first dismantling this pontoon bridge across the Han River, then
demolishing the remainder of it. 4 Jan 1951.
1951년 1월 한강의 얼음위로 건너서 남하 하는 피난행렬(한강철교와 여의도중간)
1951년 1월 5일 한강의 얼음위로 남하하는 피난민
1951. 3. 5. 한강 인도교의 중지도 북한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고 있다.
1951년 3월 16일 상판과 트러스가 파괴로 붕괴 된 광진교 부근에서 보트로 부교 설치 중.
왼편 백사장이 광나루 강수욕장 모습이다.
ES30-25-102 (SC362090) Riding on a ferry boat built of spare bridge parts and landing boats by men
of 10th Eng Combat Bn, 3rd ID, an Infantry platoon of the 7th RCT, 3rd ID arrives at the south shore
of 10th Eng Combat Bn, 3rd ID, an Infantry platoon of the 7th RCT, 3rd ID arrives at the south shore
of the Han River. 16 Mar 1951.
1951년 5월 29일 중국군 춘계 공세로 폭파된 한강철교 아래 널빤지 부교를 만들어 3차 피난
길을 떠나는 서울시민들
(이미지 50개)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5로 계속..
출처 : 고향을 그리며...
글쓴이 : 한가람 원글보기
메모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6 (0) | 2016.09.02 |
---|---|
[스크랩]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5 (0) | 2016.09.02 |
[스크랩]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4 (0) | 2016.09.02 |
[스크랩]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3 (0) | 2016.09.02 |
[스크랩]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2 (0) | 2016.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