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스크랩]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2

수미심 2016. 9. 2. 11:23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2

 

18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강의 모습인데 주제별이 아닌 년도순으로..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식

 

개통 축하 아치를 세우고 첫 출발을 시도하고 있다. 순간 기적소리에 놀란 한국 구경꾼이
넘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왼쪽 장면이 보인다. 일본은 전쟁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철도개통을
서둘렸다.
같은해 을사조약이 채결되고.. 그 후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적인 한일강제병합이..


1901년 8월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월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
부철도주
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1905년 1월 1일을 기

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경인선(1899년 9월 18일 개통)에 이은
두 번
째의 철도 개통이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체제 구축이 철도 부설 및 채광권 획득에서 비롯
되었던
많은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부선의 부설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 정책 수행의 구체
적 발판이
었다. <네이버 백과> (주제와 다르지만 참고로 첨부)


1905년 5월 25일 남대문역(현,서울역의 전신)서 거행된 경부철도 개통식(참고로 첨부..


1905년 서울 남대문역에서의 경부선 전구간 개통 축하행사 (주제와 다르지만 참고로..)


서울의 성대한 경부선 철도 전구간 개통식 광경. (주제와 다르지만 참고로...)

 
1905년 5월 25일 漢江麻浦津 (京釜線 開通紀念) 한강 마포진 경부선 개통기념<사진기록 대로>
 나룻배에 가마와 말을 싣고 도선 중이다. 인터넷에서 같은 사진을 두고 1910년대 노량진의 도선
중이라고 설명이 된 것도 있고 또는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의 설명은 1920년대 한강을 건너고
있는 나룻배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인 할 길이 없다
 


1906년 서울 한강 뚝섬나루 부근에서 인부들이 수돗물 원수(原水)로 쓸 한강물을 끌어
들이는 취수관(取水管)을 매설하고 있다.

1907년 나루의 풍경


1907년 한강의 도선장​

1910년 한강철교. 현 노량진 본동 상도터널 위에서 본 모습


1910년 차마를 실어 건널 수 있는 큰나룻배와 나루터, 최초의 한강철교가 나란히..
 
1910년경 용산에 있던 별영창으로 대동미를 출납하던 곳.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1910년 경 용산 별영창으로 대동미를 출납하던 곳이다. 마포구 도화동과 접경을 이루는 지금의
용산구 청암동쪽의 마루턱 벼랑 고개에 조선시대 별영창(別營倉)이 있었는데 현재 벼랑 앞쪽은 
강북 강변로가 나있고 그 지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벼랑위 언덕에는 벽산빌라가 자리하고있다



1910년대 서울 한강의 상징 황포돛배

땔감을 실어나르는 화목상인의 배


1910년 마포나루의 여객선


1910년대 마포나루

1910년대 마포나루 
 

마포의 한강변에서 밤섬 앞 마을을 찍은 사진. 마포구청 소장  

 

마포의 한강변에서 밤섬 앞마을을 찍은 사진. 마포구청 소장 (위의 사진 2/1 확대)

 마포 한강변에서 밤섬. 앞 마을을 찍은 사진. 마포구청 소장 (위의 사진 2/1 확대)



1910년대 서울 한강변의 고기잡이 배

1910년 조선풍속도 엽서의 한강 얼음 채빙. 제빙기술이 없었던 옛날 엄동설한에
나막신을 신은 인부들이 꽁꽁 얼어붙은 한강 얼음을 톱질하고 있다


1910년 대 조선 풍속도 엽서. 한강의 얼음 채빙

 
1911년 흑석동 앞 한강의 얼음낚시하는 사람들. 멀리 한강철교가 희미하게 보인다.
노들나루(노량진)에서 강건너 방향으로 찍은 사진

1912년 ​오른쪽에 제 2의 한강철교가 건설되었다. (조선명소 용산 경부선 한강철교)

1912년 한강철교. 노량진 방향을 보며 촬영


1912년 동쪽에 제2 철교를 가설했다. 서부이촌동 방향을 보고..
철교의 구조는 길이 628.9m짜리 플레이트 10개를 얹는 단순한 공법. 당초 성계는 양쪽 너비 1.2m
보도를 시설하고 선박 통행을 위해 개폐 시설을 하도록 했으나 일본측이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이
를 없앴다. 철교부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토목공사로기록되어 있다. 벽돌 120만장, 석재5만
개, 강철 120톤이 투입되었다.
그 후 1905년 경부선 철도의 준공으로 운송량이 증가하면서 복선화의 필요성이 대두돼 제 2철교(
현 한강철교 B)가 1912년 9월 준공되었고, 1944년 6월에는 다시 한강철교 C가, 1944년 12월에
한강철교 D가 준공돼 현재 모두 넷이 되었다. 철교의 위치는 상류에서 하류측으로 A-B-D-C 순으
로 자리해 있다. 현재 이 철교들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데, 철교 A는 용산에서 부평간 경인
통 전동열차, B는 화물열차, C는 경부선·장항·호남등 철도, D는 경인, 경수전동차가 다닌다.
한강철교 A·B·C의 현재 모습은 6.25때 국작전상 폭파로 끊긴 후 새로 복구된 것이다.

1912년 노량진쪽 철교위에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보인다. 서로 다른방향으로 진행 중

​1912년 경인선 경부선 철교의 열차가 같은 방으로 달리고 있다. 왼쪽은 기관차에서 뿜어

나오는 증기로 철교 트러스가 연기에 묻혀버렸고, 노량진쪽 한강엔 결빙된 모습이다.


1917년 준공 후의 최초의 한강인도교.
1916년 3월에 착공하여 1917년 10월 17일 준공. 1900년에 가설되었으나 17년 동안 인도교가 가
설되지 않았던 것은 우리나라에 민간인의 영업차가 들어온 것이 1912년이었고, 화물은 철도와 지
로 운송되어 당시에는 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교량은 한강철교를 준공하고 남은
재를 이용하여 가설했으므로 소교(小橋) 였고 ,폭이 좁아 중앙차도 4m, 좌우측 보도는 각 1m에
불과한 응급적인 시설이었으므로 한강 가교라고도 하였다. <네이버 백과>
이후 1925년 대홍수와 한국전쟁차례씩 파괴되었다가 재개통되었는데 1981년 쌍둥이 다리
확장된 것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모 네번의 개통식이 열렸다. 초기 현재의 한강 인도교의 트
러스 구조물의 아치형과 상이(相異)하고 교각 형태와 다리의 폭도 협소한 것은 이때문이다.

1917년 개통 초기의 한강 인도교 (조선명소옆서-경성용산한강인도교)
왼편에는 한복을 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른편엔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들이 인도교 아래
한강물을 내려다 보는 모습이다.

1917년 개통 초기의 한강 인도교


1917년 인도교와 아래 한강변, 노량진 쪽

경성 한강 인도교 아래 빙상장. (다리 끝 좌측에 용양봉저정 모습이..)

​용양봉저정(龍양鳳저亭)은 한강대교 남단에 현존하고 있는 건축물로서 정조가
그의 부친 사도세
가 묻힌 수원 화산의 현륭원을 찾을 때 잠시 쉬던 정자이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사도세자
가 있는 현륭원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잠시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정조 13년(1789)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주정
라 불리기도 하였다.  지을 당시에는 정문과 누정 등 2∼3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
금은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의 정자만 남아있다.

↓ 아래 (현 한강대교 주변자리에 주교 표지석이 있기도...)

한강인도교 이전의 이 자리에는 배다리(주교舟橋)가...
임금이 한수 이남지방의 행차시 주교(舟橋)를 가설한 장소가 현재의 한강대교가 가설된 장소
다. 경강선 80여척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관리들은 세곡운송을 구실로 배를 동원하고 선
주들은 이를 기회삼아 세곡운송 용역 이권을 독점하려 했다. 선주들은 외부에 나가 주교에 참
가 한위세를 떨치며 민폐를 끼치기도 함. (자료:브리테니커) 어쨌든 한강 최초의 다리는
주교였다.

주교(舟橋)에 대해

한강에 다리가 놓여지기 한참 전에도 배를 엮어 강에 다리를 놓는 일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한 
은 ​아니지만 고려시대 정종 11년(1045)에는 유사(有司)에 명하여 임진강에 부교를 가설하게
한 일이 있고, 조선시대 연산군 때에는 왕이 청계산에서 수렵을 즐기기 위하여 거둥(擧動)
간선 800척원하여 한강에 다리를 놓고 수십 기(騎) 가 내왕한 일이 있다.  후 선왕의
등을 찾는 왕들의 도강을 위해 만들어진 주교(舟橋)는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기려 화성
궁을 건설하매년 화찾았다. 1795년 화성행차를 앞둔 정조는 배를 동원해 11일만에
를 완성하였다.  한강 주교는 왕을 위한 다리였고 징발과 부역의 이중고가 겹친 백성들의 원
이 잦았다고 한다.

1918년 한강인도교
 
1918년경 현 노량진 본동 인도교 남단 (오른편에 용양봉저정 모습이)
후일을 미리 보자면 도로의 왼편 공간은 후에 노량진 수원지가 들어서며, 도로의 커브길 휜부분
방향으로 60여년 후인1981년 12월 다리 왼편에 또 하나의 쌍둥이 다리가 준공됨과 때를 맞춰 상
도동 방향으로 쉽게 갈 수 있는 쌍굴터널도 12월 31일에 개통하게 된다. 상도터널이 건설되기 이
전까지는 매봉로(고갯길)로 넘어서 또는 노량진역을 지나 장승배기로 돌아가는 불편함이 있었다.

 
1918년 한강철교 옆 지질조사소[地質調査所] → 1924년 연료선광연구소[燃料選鑛硏究所]
 
 

한강의 겨울 풍경

사진 앞쪽의 다리가 한강 인도교, 뒤쪽에 보이는 두개의 다리는 한강철교 A선과 B선
1920년대 한강의 겨울낚시. 앞쪽은 한강인도교, 멀리는 한강철교 모습

조선명소 경성 용산 한강채빙. 아랫쪽에 한강철교
1920년 한강철교

 

송파(津)나루. 현 석촌호수자리


용산 청암동 발전소 부근 모습. 중앙에 용산 별영창이 있는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일강점기 때의 용산 청암동 발전소
마포 당인리(唐人里)화력 발전소도 일제 때 건설된 것이지만 용산 청암동에도 발전소가 있었다.

 

 

일강점기 때의 용산 청암동 발전소



일제시대 마포나루. 자료 출처:네이버


1920년대 서해에서 새우젓 배 등이 드나들던 한강의 마포(삼개)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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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향을 그리며...
글쓴이 : 한가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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