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용양봉저정

수미심 2014. 5. 3. 05:52

용양봉저정

   
용양봉저정
(龍驤鳳翥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지정번호유형문화재 제6호
(1972년 5월 25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32길 14-7
제작시기조선 정조 15년(1791년)
소유자국유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1791년(조선 정조 15년)에 세워진 건물이다.정조가 수원 화산에 있는 아버지 장조의 무덤인 현륭원에 참배하러 갈 때, 지금 한강의 한 부분인 노들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건너가 잠시 쉬기 위하여 행궁(行宮)으로 쓰던 곳.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 석단 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목조단청기와집으로 조선 정조가 수원에 있는 현릉원에 행차하는 길에 쉬어가는 곳으로 건조된 것이다.

정조 13년에 아버지 장조의 무덤인 영우원을 화산 수원으로 옮겨 현릉원이라 했는데 정조는 자주 이 현릉원에 행행했다

가마를 타고 한강 주교를 건넌 정조는 이 용양봉저정에서 잠시 머물러 휴식을 취하고 점심을 들곤했다. 서정소라고도 불렸던 이곳에는 당시 노들강(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주교사와 주교대장도 있었다.

이 건물은 견실하고 단아한 정조 대의 행국건축으로 주위에는 일부 건물의  기단부와 주초석이 아직도 남아있고 당초에는 정문과 두어채의 다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간통 단층인 이 용양봉저정은 온돌구조로 견실하게 지어졌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후부터 중앙대학교 부속여자고등학교와 보호결연을 맺어 학생들이 문화재 주위를 청소해 오고 있다

정조의 효심, 능행사길의 용양봉저정

 한강대교 앞, 노량진 본동에서 흑석동으로 돌아서기 직전의 우측 모퉁이에는 용양봉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1791년인 정조 15년에 세운 행궁으로, 정조가 수원 현륭원 참배 길에 잠시 쉬며 점심을 먹던 곳이다. 정조는 한강을 舟橋로 건넌후 행차를 멈추고 이곳에서 쉬었다.(유형문화재 제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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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궁은 상당히 큰 규모였으나,정면 6칸, 측면 2칸의 10 여칸짜리
정자 한 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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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양봉저정-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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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터지만 오른쪽 측면은 돌아가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11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처참한 운명을 겪은 정조는 다행히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한 영조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세손에 봉해졌다.
정조는 조부로부터 군왕으로서의 수련을 착실하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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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배 행사의 정략적 의도
정조는 25세 때 즉위하여 노론의 권신들이 좌지우지하던 정권과 군권을 국왕이 장악하는데 10 여년이 걸렸다고 한다. 신하에게 배워가며 다스리는 임금이 아니라 가르치며 통치하는 국왕이 되겠다는 그의 이상을 실현할 사업이 필요했다. 그렇게 구상된 것이 화성 건설과 웅대한 참배행사였다.  

겉으로는 노론 벽파의 음모로 뒤주에 갇혀 8일만에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원한을 설욕하는 일이었지만, 정조의 화성 참배 행차는 왕권을 장악한 정조가 신하와 백성의 충성을 집결하여, 백성을 위한 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숨어 있었다. 시위적인 행차를  함으로서 뿌리 깊은 권신들의 조직적 세력을  제압하려는 정략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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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의 난간을 두른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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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양봉저정 옆 뜰에 방치된 받침주와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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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뒷면 툇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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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뒷뜰의 소목 뒤로는 바로 담이 바짝 붙어 있다. 

 

모아 둔 옛 기둥의 받침돌들, 그리고 바로 골목길  건너는 교회 건물이다. 이 교회도 100년이 된 교회로 많이 비대해져서 교육관등 새 건물들이 크고 높아 용양봉저정을 아주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조의 재위 24년간 행해진 66회의 궐 밖 행차 중  절반 이상이 화성행차였다고 한다. 화성을 남부의 정치.군사적 거점도시로 육성하여 수도 한양의 붕당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그리고 그리고 화성 행궁에서의 별시를 통해 인재를 등용했고,
약 1만명을 동원한 군사훈련도 시켰다.  
  
정조는 66회 행차중에 3355건 억울한 호소와 고발을 처리하였다.
한번 행차에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한 셈이다. 정조의 행차는 직접적인 민심수렴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었다.  정자 왼쪽 측면의 이런 살림집은 곧 정비할 계획이라고 했다. 참 초라하게 정조대왕 능행차도가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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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주교) 가설은 노량진에 舟橋司를 두어 수백척의 배 동원과 일반인 한강 통행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짧은 시간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건설하는 방법을 강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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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보면 홍살문이 보이고 그 위의 용양봉저정이
여러 칸의 건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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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여명의 거대한 행렬이 8일간의 일정으로 행해지는 행차였다.
다른역사기록에 의하면 배다리는 고려고종때 임진강에 부설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의 능행이나 사냥, 온천행차에 한강에 여러 차례 가설되었다.연산군과 숙종도 능행을 위해 노량진에 부교를 연결시켜 강을 건넌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무렵 정조의 총애 받으며 화성건설에 참여했던 실학자 정약용은
이 주교에 대해 시를 남겼다.

<한강물 어찌 그리 넓은지 깊이를 알 수도 없다.  
때로 높은 물결 일어나니 이무기, 용이 숨어 있다네
천척 많은 배를 비단 필처럼 얽어매니,
물 위에 다리 없다 누가 말을 하오리
대순 같으신 성효의 마음
해마다 원침에 근참하신다
......
푸른 파도 하늘가에 닿고 흐르는 물은 지면을 가른다
깃발 그림자도 휘황한데 바람에 펄럭여 방향이 없구나!
까마귀와 까지 되었으면 강물 메워 평안케 하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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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양봉저정 바로 앞의 노량진 주민센터 옆의 작은 컨테이너 건물이
이 용양봉저정을 관리하는 곳이다. 동작구에서는 행궁 바로 옆의 낡은 집들 두어채는 매입을 끝냈고, 곧 헐어서 정화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참고 : 박경하교수의 '정조의 능행차와 용양봉저정', 동작문화유산 4권


동작이야기에서는 용양봉저정을 ‘부모를 향한 지극한 효심’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곳에 쓰인 글을 빌자면 정조 15년(1791)에 지어진 행궁이다.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 참배 길에 한강을 건넌 후 잠시 휴식을 하던 곳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1789년 부친인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화산으로 옮겨 현릉원을 조성하고 자주 참배했다. 이때 왕의 어가 행렬이 주교(배다리)를 놓은 한강을 건너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장승배기를 거쳐 수원으로 행하였다.

 

건조 연대는 정조 13년(1789) 이후로 추정된다.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이름의 정자는 당시 한강을 건널 때 놓았던 주교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오늘도 말없이 유유히 흐르는 한강 변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버이를 섬기는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예전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었던 한강에 최초로 놓인 다리는 조선 시대의 주교(舟橋·배다리)다. 선왕의 능을 참배하는 왕의 도강을 위해 배를 밧줄로 엮어 만든 임시 배다리를 가장 많이 이용한 왕은 정조였다.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릉원을 경기 수원에 조성한 이후 매년 한 차례 이상 이곳을 방문하려 한강을 건넜다.

 

현재 서울 동작구 본동 주민 센터 뒤에 있는 용양봉저정은 정조 15년(1791년)에 지어진 행궁으로, 정조가 잠시 쉬어 가던 곳이다. 처음 지을 때에는 정문이 있고 주 교사로 쓰는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1930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에 온천장, 운동장, 식장 등을 두어 오락장으로 삼고 그 이름도 용봉정으로 고쳤다. 그때 요정으로 쓰이기도 했다가 광복과 함께 다시 국유로 환원된 후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을 찾았다.

 

정자에 올라서면 말없이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효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동작구에서 조성한 ‘동작 충효길’을 따라 걷는 것도 방법으로 용양봉저정은 지하철 9호선 노들역 2, 3번 출구에서 3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때 이른 분홍 철쭉꽃이 용양봉저정 오르는 계단 양쪽에 흐드러지게 피었다. 2학년 영현이가 재빠르게 뛰어가 철쭉 분홍 꽃잎을 하나 따서 “선생님, 꽃 예쁘지요. 선물!”이라며 쑥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1학년 솔비가 “오빠, 꽃을 따면 어떡해? 꽃은 여러 사람이 보는데 따면 나쁜 거죠?” 하며 내게 눈빛을 보내는데 난 누구 편도 들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계단을 오르자 용양봉저정 뜰 한쪽에 수수꽃다리가 보랏빛 향기를 밀어 올렸다. 아이들에게 라일락이라는 꽃 이름도 함께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한적한 뒤뜰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면서 뛰어놀았다.

 

뒤뜰에는 화투짝에 들어 있는 매조 꽃과 개 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도 하얀 꽃을 달고 한강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잎들이 속살거렸다. 아이들과 툇마루에 옹기종기 걸쳐 앉아 끝말잇기를 했다. 1학년인 솔비는 버거운지 번번이 잡혔다. 그러자 손위 아이들은 재미가 없는지 그만두자고 했다.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 난 좋았는데 아쉬웠다.

    

 

그때 4학년 태욱이가 “선생님, 이곳 이야기 다시 해주세요.”라고 졸랐다. 평소 수업시간에 산만하고 집중을 잘하지 않던 아이가 역사에 관심을 보여 약간 놀라웠지만 난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아이들은 “그럼 좋은 왕이었네요. 아버지께 잘했으니까요.” 라는 아이들과 손을 잡고 센터로 돌아오면서 다음, 좀 더 자라면 우리 한국사에 대하여 더 많이 알 수 있다고 덧붙여 주었다.

 

정조가 설치한 배다리 전담 관청인 주교사는 1882년 폐지됐으며 1894년을 끝으로 배다리도 자취를 감췄다고 전해진다. 정자에 올라서면 말없이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효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동작구에서 조성한 ‘동작 충효길’을 따라 걷는 것도 방법. 용양봉저정은 지하철 9호선 노들역 2, 3번 출구에서 3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버스는 노량진 본동에서 내려서 3. 4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비록 짧은 봄나들이지만 아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아이들에게 우리 효와 역사현장을 함께 체험하여 의미 있는 봄나들이였다.

수원 화성 용주사 융건릉 능참봉 3년 사도세자 배봉산


배봉산(拜峰山)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있는 이다. 1992년에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전체 면적은 265,582㎡이다. 인근에 서울시립대학교, 삼육보건대학, 삼육의료원 서울병원 등이 있다.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수원으로 옮겨지기 전에 배봉산에 있었다.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남양주로 옮겨지기 전에 배봉산에 있었다. 배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불분명하다. 정조가 부친의 묘소를 향해 절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 산의 형상이 도성을 향해 절을 하는 형세를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 이곳에 왕실의 묘소인 영우원과 휘경원이 있어서 나그네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배봉산 앞뜰의 동적전에서 왕이 친히 농사를 지으며 하늘에 풍년을 기원한 선농제와 관련이 있다는 설 있다.    배봉산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있는 산이다. 1992년에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전체 면적은 265,582㎡이다. 서울시립대학교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배봉산 남북을 잇는 거리가 3.5km라고 안내되어 있다. 인근 답십리 근린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거리는 5km라고 소개되어 있다.배봉산 유래 는 도성을 향하여 절을 하는 형세를 띄고 있다 하여 붙은 이름과  이곳에 영우원과 휘경원 등 왕실 묘원이 마련되어 서민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게 되어 붙은 이름   또 옛부터 이 산에 배나무가 무성하여 ‘배봉’이라 불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