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청권사

수미심 2018. 2. 5. 08:25

청권(淸權)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할 때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淸權祠),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至德祠)라 하였다.

《청권집유》(淸權輯遺)은 조선 후기의 문신 이돈영(李敦榮)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사적(事蹟)을 모아

기록한 책이고 《청건사소》(請建祠疏)는 청권사(淸權祠)를 지어 대군의 위패를 봉향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다. 《연설》(筵說)은 경연(經筵)에서 강의 도중 청권사의 건설을 건의한 내용이다.

《청권집유》에는 상하로 나누어 대군제영시(大君題詠詩) 2수를 비롯하여 자설(字說)·원파기(源派記) 등

 잡문 49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원파기》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전주이씨의 시조는 신라시대의 사공(司空) 한(翰)이라고 말한 뒤 자기들의 중조(中祖)는 효령대군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효령대군의 사당과 묘소

청권사




▲ 청권사의 정문인 외삼문



    서울시 지하철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단청이 아름다운 문과 그 뒤로 이어진 초록색 언덕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곳은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제4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청권사입니다.

  청권사는 효령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의 이름이지만,

묘소와 사당이 있는 이 묘역을 가리켜 청권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청권사 바로 앞을 지나는 도로의 이름이 ‘효령로’가 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청권사는 '효령대군 이보 묘역'이라는 명칭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에 지정.

 

 

효령대군은 1396년(태조5) 태종대왕과 원경왕후의 둘째 왕자로 태어나셨으며,

휘(諱)는 보(補),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온화문명하고 효제충신의 자질를 갖추었고, 글읽기를 좋아하고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2세에 효령군으로 봉군되시고,

좌찬성 정역공의 따님 이신 해주정씨와

혼인하셨으며, 17세에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셨다.
효성이 지극하시어 부왕(태종대왕)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고, 아우이신 충녕대군(세종대왕) 에게 성덕이 있음을 아시고

학문과 재덕을 숨기시면서

왕위를 겸손하게 사양하셨다.
조선왕조 개국 초기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입각한 왕권확립과 종교변혁기에 동요하는 백성들의 민심이반을 총화로

이끌기 위해 유ㆍ불 조화론을 주창하셨고, 나라의 안정과 왕정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시며, 불서의 국역과 사찰의 증개축 및 법기 조성 등의 불사와 보국안민과

태평성대를 위하는 위업에 전념하셨다.

 
  특히, 백성들의 자치규범으로 ‘향헌(鄕憲)56조’를 제정하시어 대민강론으로 백성들의 윤리 도덕과 의식교화에 헌신하셨다. 또, 효에 대한 이론정립과 권계하실 목적으로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를 사경하셨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보2호인 ‘탑골공원의 10층석탑’의 건립과 보물2호인 ‘보신각종’의 주조를 직접 감독하셨다. 그리고 옛 흥복사 터에 원각사를 짓게되자 그 역사를 주관하셨으며, 계정혜(戒定慧)에 바탕을 둔 불법의 수련을 독실히 하시 면서, 연주암(관악산), 무위사(월출산), 백련사(만덕산), 회암사(양주) 등의 많은 사찰을 중건ㆍ중수하셨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연화경(蓮華經), 금강경(金剛經),원각경(圓覺經) 등의 우리말 번역을 비롯하여 많은 호국불사를 주장하시고 불교발전에 지대하신 공적을 또한 남기셨다.
대군께서는 왕자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공명과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초탈하신 삶으로 한 평생 충(忠), 효(孝), 덕(德), 우애(友愛), 겸손(謙遜), 검소(儉素), 조화(調和), 화목(和睦) 등을 몸소 실천하시며 천수(天壽)를 사신 분이시다.
조선왕조를 창건하신 태조고황제로부터 9대 성종대왕에 이르기까지 아홉 분 임금님의 조정을 보필하시면서 명예와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왕실의 번영과 나라발전에 공헌과 충성을 다하셨다.
 

대군은 위민정신의 실천자이며 진취정신의 선구자로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근본적인 역할을 다하셨으며,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존경과 예우를 받으시며 사시다가,

1486년(성종17년) 5월 11일 91세를 일기로 하세(下世)하셨으며, 시호(諡號)는 정효(靖孝)공이시다.

 
 

정효의 뜻은 너그럽기를 즐기며 고

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하고,

지혜롭게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한 것을 효(孝)라 한다. 슬하에 7남을 두셨으며

여섯째 아들 원천군(原川君)은

아우이신 성녕대군에게 출계시키셨다.

손 33인과 증손자 109인을 두셨으며,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禮葬). 또한, 배위이신 예성부부인 해주정씨는

좌찬성 정역(鄭易)공의 따님으로서

1394년 태어나 14세에 대군 배필이 되셨다. 효순하고 현숙하시어 부덕(婦德)이

외명부 중에 으뜸이셨다. 대군을 정성껏

내조하시다가 1470년(성종1) 77세를 일기로 하세(下世)하셨다.

   
 
  1737년 영조대왕께서 묘하에 사당을 세우게 하시고, 1789년 정조대왕께 서는 사당의 현판을 하사하셨으며, 1865년(고종2년) 종묘(宗廟) 공신당(功臣堂)의 세종대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셨다.


방배동 동명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으로 方背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일설에는 마을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라는 뜻으로 方背洞이 되었다고도 한다.

방배동의 유래는

 관악구서초구와의 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 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으로 ‘방배’라한데서 연유한다.

방배동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방배리였으나, 일제때인 1914년 경기도 구역 확정때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방배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특별시의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방배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위치는 서초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이며

서울에서 과천시에 이르는 도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곳에서 우면산에 이르는 지역이다.[1]

연혁[편집]

고종명 [] 바로저장 단어장선택

  • 1.사람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
  • 2.자기 대로 살다가 평안하게 죽다
 

사람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 오복() 하나 여긴다.

약어
고종7(考終)
참고어
강녕2(康寧),2(富)(1),9(壽)(1),유호덕(攸好德)
유의어
영종1(令終)
 그림자처럼 붙어 따라다님, 자신 타고난 수명 누리고 살다가 편안히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