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8일 새벽에 벌어진 한강다리 폭파사건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피난민들이 희생당했고, 철수길이 막힌 국군과 경찰, 공무원,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인민군 치하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었다. 이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여러 가지 주장이 많지만 어쨌든 인민군의 남침은 3일 동안 지연된 것은 사실이었고, 이는 한강다리를 수리하느라 3일을 지체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이유로 쓰였다. 따라서 한강다리 폭파는 인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런 반면, 너무 일찍 폭파하여 피해가 더 컸다는 비판도 이미 사건 초기부터 ‘적당히’ 제기되었다. 결국 폭파책임자가 군법회의로 사형까지 당했으니 이만하면 어지간히 의혹이 파헤쳤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만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한국전쟁의 본질을 성찰해야 하는 더 심각한 문제가 이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폭파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한강다리가 폭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한강다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한강다리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채병덕 총참모장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전화로 한강폭파를 명령했다. “지금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와 돈암동을 지나서 동소문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미 배치한 전차공격조는 그대로 두고 즉시 한강으로 가서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실시하라.”
명령을 받은 최대령은 새벽 2시 20분 한강인도교로 가서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에게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엄중령은 이 명령을 각 폭파책임자에게 전달했다.
이시형 부통령이 한강을 건너는 것을 끝으로 폭파책임자들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황원회 중위는 가장 상류에 위치한 한강인도교의 도화선에, 임흥순 중위는 중간 2개의 경인선 단선철교 도화선에, 이창복 중위는 한강 하류 방향에 있는 경부복선철교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먼저 한강철교 3개 지점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하늘에 큰 화염이 일었다. 그리고 10분 후에 한강인도교 북쪽 두 번째 아치가 폭파되었다. 당시 한강인도교 가까이 있었던 언론사 특파원 깁니(Gibney)는 “지프에 되돌아와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이 갑자기 오렌지 색깔의 큰 화염으로 밝아지고 굉장히 큰 폭발음이 우리 바로 앞에서 일어나 우리가 탄 지프가 4~5m나 쳐들려 날아갔다”고 회상했다. 이들의 앞에 가던 트럭이 폭발했거나 강물로 추락했고 남아 있는 다리 위에도 시체와 부상자로 뒤덮였다. 당시를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이로 인해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명에서 800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강철교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강의 다리들이 모두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한강인도교와 경인철로 하행선, 경부복선철도 상행선 철로는 완전히 전단되었지만 경인철교 상행선과 그 옆에 있던 경부복선철도 하행선 철로에 설치되었던 폭약이 폭발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강 상류방향부터 순서대로 보자면, 상류에 한강인도교가 있었으며, 중간에는 상행선과 하행선 2개의 경인철교가 있었고, 그 다음의 1개의 경부복선철교가 있었다. 경인철교와 경부복선철로 모두 좌측통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지하철 1호선과 같은 방식이다. 증언자들의 기록 역시 이와 일치한다.(오늘날 경인철도는 한강 상류 쪽 철교가 상행선이고 하류쪽이 하행선이다.)
철교가 폭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은 여러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제1공병단의 엄재완소령은 한강교가 폭파된 1950년 6월 28일 동이 틀 무렵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열차가 건너가는 것을 보고 경부복선 하행선 철교 위를 건너 오전 8시 노량진에 도착했다. 자신의 뒤로 3/4톤, 2톤 반 트럭 등 차량 몇 대가 건넜다고 증언했다. 증언에 따르면, 이 열차에는 군수국장 양국진 대령이 타고 있었다. 이날 유재흥 제7사단장 역시 새벽에 같은 철교를 건넜다. 유재흥은 자신이 건넌 철교가 반파상태에서 병력과 일부 차량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하고 인민군이 이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완전절단을 명령하기도 했다.
당시 공군 정찰기 조종사 윤응렬은 수원으로 철수한 6월 28일 김정렬 공군 총참모장으로부터 끊어진 한강 다리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울 상공을 비행하면서 폭파된 한강다리와 서빙고에 머물고 있던 인민군 전차를 목격했고 이를 보고 폭파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고 한다. 반면, 이강화 중위는 1950년 6월 30일 위 김정렬로부터 육군 정보국 차장 이종국 대령을 정찰기에 태우고 한강철교의 폭파여부를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정찰한 결과 철교들 중 1개가 그대로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경부복선철교를 지나면서 설치현장을 목격한 엄재완 소령은 철교가 폭파되지 않은 원인에 대해 “도폭색(導爆索) 등이 그대로 늘어뜨려져 있어서 사전에 폭파준비는 하였으나 어떤 이유로 하여 폭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철교가 완전히 절단되지 않은 것은 나의 판단으로는 당시의 화구(火具)에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곳의 폭파담당자 이창복 중위는 뇌관을 수리한 후 다시 점화 폭파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유재흥의 명령으로 6월 28일과 29일 2개의 철교에 대한 폭파를 계속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미군은 처치(Church)준장의 요청으로 1950년 6월 29일 오후 1시 B-26 경폭격기로 한강철교를 맹폭격했으나 결국 이를 파괴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미군은 6월 30일 폭격으로 중간철교인 경인철교 하행선이 절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민군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백선엽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폭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한강 철교를 중심으로 맹공을 퍼부었다고 적고 있으며, 『한국전쟁사』는 6월 29일 인민군 공병이 경부복선철교에 새로운 교판을 설치했으며, 6월 30일 아침 미 5공군 3폭격전대가 중간의 한강철교에 목판을 깔면서 건너는 전차를 발견하고 폭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인민군은 이미 철교 일부가 온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결국 증언과 폭격현황 등을 종합하면 경부복선철도 하행선은 반파되었고 경인철교 상행선은 온전했다는 것인데, 반파의 정도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지만, 엄재완 소령에 따르면 2톤 반 트럭까지 건널 수 있었다고 하니 그리 큰 정도의 파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2개 철교가 무사했다는 것의 의미
흔히 인민군이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후 한강을 넘어 공격을 계속하지 않은 이유로 한강을 도하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다거나 부서진 철교를 수리하느라 시간이 걸렸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1개의 철교가 완전한 상태였고 또 다른 1개의 철교는 일부분만 부서진 것으로 확인되므로 이로 보아서는 인민군의 한강건너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후 인민군은 6월 30일부터 한강 도하를 시도했으며 결국 이 철교를 건넌 인민군 전차 4대에 의해 7월 3일 국군의 영등포 방어선이 무너졌다고 한다. 결국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한강 이북을 전선으로 남침을 중단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를 ‘3일간의 수수께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한강 너머 김포지역이 6월 26일 점령당했다는 사실도 이 주장에 대한 또 다른 근거이다.
6월 28일 행주나루터를 통해 한강을 건너던 국군은 김포 개화산을 점령한 인민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사실이 여러 증언에서 확인된다. 이 상황으로 보아 김포를 점령한 인민군들 역시 남침을 계속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는데, 이들이 전력을 재정비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도하장비의 부족으로 한강을 넘지 못했다거나, 한강철교 수리하느라 또는 국군이 3일간 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춘천을 방어한 제6사단의 선전 때문에 인민군이 3일을 지체했다는 주장 역시 육군본부의 후퇴 명령의 원인이 서울 함락으로 인한 제6사단의 고립 우려 때문이었고, 같은 시기 인민군 측의 무선교란에 의해(국방부 주장) 제8사단이 전투를 중단하고 대구까지 후퇴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춘천방어가 인민군에게 남침을 중단할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북한 정권이 총 동원령을 내린 때는 7월 1일이었다고 한다.
한편 백선엽은 7월 3일 영등포 전선의 붕괴에 대해 “한강방어선을 6일간 지켜냈다”고 적고 있다. 과연 그랬던 것일까? 7월 3일에 있었던 영등포전선의 붕괴가 한강을 건넌 인민군 전차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전차는 그 전에 영등포에서 전선을 위협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즉, 한강방어선을 붕괴시킨 것은 철교가 아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의 가능성에 대해서 뒤 3장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폭파 준비
당시 한강에는 한강인도교, 한강철교, 광진교 등 모두 5개의 다리가 있었다. 28일 새벽 4시에 폭파된 광진교를 제외하면 당시 폭파대상이었던 한강의 다리는 한강대교와 3개의 철교였다. 최 공병감은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을 받고 이들 4개의 다리에 대한 폭파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 때가 6월 26일 오전 11시였다. 지시를 받은 공병학교 폭파교관들은 즉시 현장을 답사하여 폭약 설치장소와 방법, 폭파 위치를 결정했다.
이를 보고받은 공병감은 다음 날인 6월 27일 오전 9시 공병학교장에게 폭약을 비롯하여 폭파와 관련된 모든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4개 교량을 절단할 7,000 파운드의 폭약이 준비되었다.
오전 11시 육군본부에서는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국방차관 장경근, 육군참모부장 김백일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육군본부의 시흥철수와 정부의 철수 직후인 오후 2시에 한강교를 폭파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전세가 유리하다는 보고에 따라 폭파일정은 연기되었다. 이후 오후 3시까지 폭파 준비를 완료하되 “교각은 손상을 주지 않도록 폭약을 장치하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3개 팀이 한강대교, 2개의 단선철교, 경부복선철교를 각각 나누어 폭약을 설치했다. 설치작업은 12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3시 30분에 모두 끝났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시흥으로 철수했던 육군본부가 다시 복귀했으므로 오후 4시로 예정되었던 폭파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다시 연기되었다. 오후 3시 복귀하여 한강교 폭파지휘소를 찾은 김백일 대령은 “차후 다리의 절단은 총참모장과 나, 그리고 공병감의 명령 없이는 실시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만약 폭파명령이 하달된 후 교량이 절단되지 않거나 명령 이전에 절단하여도 엄벌에 처한다”라고 했다. 어쨌든 폭파준비는 모두 마쳤으며 마지막 명령만을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폭파 당시 인민군은 어디까지 왔을까?
한국전쟁을 다룬 역사서들 하나같이 한강교 폭파가 조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의 공식적 입장은 한강교들의 폭파가 조기에 이루어져 피해를 많이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입장 역시 조기폭파였다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고 있다. 강준만 교수는 ‘6~8시간 여유가 있음에도 서두른 한강 다리 폭파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굴든 역시 이와 같은 입장으로 인민군이 시내에 들어온 때를 낮 12시로 보고 있다.
이렇게 폭파가 서둘러 저질러진 것이라는 주장의 전제는 인민군이 한강에서 꽤나 먼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서울에 진입했다는 인민군은 폭파시점인 28일 새벽 2시 30분에 도대체 어디까지 와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증언은 참으로 다양하다. 퇴계로 등 서울 시내를 기준으로 볼 때, 인민군의 서울시내 집입에 대한 증언 중 가장 빠른 것은 밤 11시였고, 가장 늦은 것은 새벽 1시 30분으로 나타난다.
전쟁사는 6월 27일 오후 5시 인민군의 전차가 서울 외곽인 길음교에 나타났다는 것을 부인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당시 중부경찰서 정보계장이었던 조응선은 밤 11시 인민군 일부가 퇴계로까지 진입했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급하게 철수를 시작했으며, 중부경찰서 후퇴 행열이 충무로에 있던 해군본부 앞을 지나면서 인민군의 공격으로 1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자정 무렵 서울역에 도착했으며 2시에 한강인도교를 건넜다.
미아리에서 인민군을 저지하던 국군 5사단 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27일 밤 11시 전황이 불리해지자 육군본부에 긴급조치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육군본부는 서울을 떠난 후였으므로 아무런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러자 28일 새벽 1시 사단에 대해 노량진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사단장은 철수도중 창경원입구에서 인민군 전차를 목격했다.
6월 28일 1시 45분 돈암동 전선에서 온 강문봉 대령은 육군본부에 있던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적의 전차가 시내에 침입했다’는 보고를 했고, 이를 보고받은 총참모장은 인민군이 ‘돈암동을 지나 동소문동으로 향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서울시내에 바리케이트가 있었다면 인민군의 전진 속도를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증언으로 보아 당시 서울시내에 설치된 바리케이트는 제 구실을 못했으며 조직적인 시가전 역시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갖고 있던 총참모장이 보기에 인민군의 한강 진출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한강교 폭파 직전, 인민군 전차의 돈암동 등 시내진입은 제5사단 참모장 박병권 대령 등도 목격했으므로 강문봉의 보고는 사실로 보인다. 한편, 이치업 대령은 서울역 부근의 인민군 전차를 목격하고 이를 피해 육군본부에 도착한 것이 새벽 4시경으로 추측된다는 증언을 했다. 시간에 대한 이치업의 기억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로 보아 인민군은 이미 서울역에 진주해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충무로에 있던 중부경찰서 근무자들이 밤 11시 서울역으로 후퇴하던 중 해군본부에서 총격을 받았다면 실제 인민군이 서울시내에 진입한 시간은 훨씬 앞당겨진다.
조기 폭파가 맞나?
그렇다면, 이를 조기폭파라고 할 수 있을까?
밤 11시에 이미 인민군이 퇴계로까지 진입했다는 정보가 돌았다. 그리고 11시 30분 전세가 악화되자 다시 폭파 준비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세드베리(George R. Sedberry) 소령은 밤 12시 ‘아직 1만여 명의 군인들이 장비를 가지고 건너오지 못하고 있는데 한강을 폭파하려 한다’는 내용의 긴급 전화를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에 걸었다. 이에 따라 군사고문단의 우드(Walter G. Wood Jr)중령은 김백일 대령에게 폭파 중지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민군이 시내에 진입했다는 시간 중 가장 늦은 것을 기준으로 보자면, 인민군은 새벽 1시 30분에 돈암동에 진입하여 2시에 동소문로를 지났다. 1시 30분 즈음에 창경원입구에서 인민군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들이 2시 30분에는 용산(육군본부)에까지 도착할 것으로 예측했다면 2시 30분의 한강교 폭파는 조기폭파라고 할 수 있을까?
인민군은 28일 오후나 되어 한강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이미 한강교들이 폭파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건널 수 없는 다리를 향해 서둘러 한강변에 도착할 이유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한강교 폭파 후의 인민군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일렀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한편, 미군사고문관들은 인민군이 용산(육군본부)에 왔을 때 한강교를 폭파하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반면, 최창식 공병감은 인민군 서울시내 진입하고 2시간 40분 후 폭파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고 한다. 즉, 12시에 인민군이 시내에 진입했다면, 2시 반에 이루어진 한강인도교 등 폭파는 이른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당시 국군 수뇌부는 아군의 보호가 우선인가 아니면 인민군의 공격 저지가 우선인가를 놓고 전략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병사들의 희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국군수뇌부로서는 병사들이 희생되거나 피난민들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그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굴든은 “국방부 고위관리는 군인 몇 천 명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북한군 탱크가 한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다리를 곧 폭파하라고 명령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반대하는 채병덕을 억지로 지프에 태워 한강을 건너게 했다고 한다. 굴든은 김백일은 폭파에 찬성했으며, 채병덕은 반대했다고 적고 있다. 이미 사형당한 최창식 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한 1964년 군법회의는 “비록 인도교의 폭파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군작전을 수행키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수뇌부들에겐 후퇴하며 책임져야 할 중화기는 없었으며, 또한 결정권자 대부분은 이미 안전하게 이동한 뒤였다. 그리고 부족한 병사와 물자는 미국이라는 외부로부터 충원 받으면 될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승만의 줄기찬 주장이기도 했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27일 오후 2시 국방부를 출발하여 오후 3시 수원역에 도착했다. 반면 대부분의 병사들은 중화기를 포기하고 개인 화기만을 가지고 나룻배를 이용해서 한강을 건넜다.
희생자로 확인되는 사람들은 민간 피난민이 아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6월 28일을 전후하여 한강교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제를 열고 있다. 국가가 진실규명과 위령사업을 외면하고 있으니 피해자 관련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 추모제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행사의 참석자들은 희생자들 대부분이 피난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이승만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피신한 직후였으므로 군인 경찰들보다는 민간인들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피난상황에서 항상 군의 후퇴작전이 우선이었지 피난민들은 작전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 사건 역시 당시 피난의 상황에서 피난민들이 국가로부터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분명하게 확인된다.
당시 북한강파출소에는 헌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밀어닥치는 차량과 인파로 대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고 한다. 폭파는 이시영 부통령의 도강을 끝으로 도강이 잠시 중단된 틈을 타 진행되었다. 목격에 따르면, 이로 인해 직접 당한 피해가 차량 50대, 인명 500~800명으로 추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 1』(1977)에는 희생자 중 후퇴하던 종로경찰서 근무자 77명이 포함되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는 “종로경찰서는 28일 2시 30분에 트럭 8개에 병력을 분승시켜 한강인도교를 건너던 중 4대는 무사히 도교(渡橋)하였으나 5번 차량부터는 교량과 함께 폭파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이상훈 경위 외 76명이 순직하였으며”라고 적고 있다. 이는 폭탄이 설치된 한강인도교 북쪽 두 번째 아치에 종로경찰서 차량 4대가 있었고 여기에는 77명의 경찰관이 타고 있었다는 말이다.
한강교의 희생자들 상당수가 민간인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정황은 고든 리트먼의 『인천 1950』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은 전쟁 발발 직후 부유잔교로 한강을 건너려는 피난민들의 사진을 소개하면서 “남한의 군 당국이 피난민으로 위장한 파괴공작원의 활동을 우려하여, 피난민의 한강교 사용을 금지시키자, 통나무와 널빤지 등으로 다리의 교각을 따라 부유잔교를 만들었다. 이 부유잔교는 6월 28일에 파괴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진대로라면 피난민들은 전쟁 초기부터 한강철교나 인도교를 건널 수 없었다. 이로 보아 결국 폭파 당시 한강교를 건너던 사람들은 민간인들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1950년 8월 3일 미군에 의해 자행되었던 왜관교 폭파의 희생자 수백 명은 거의 대부분이 민간 피난민들이었다. 국군과 미군은 모두 8월 1일 이미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한강교 폭파가 전쟁에 끼친 영향은 과장되었나
한강교 폭파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퇴로를 잃어버림으로서 국군 스스로가 무장해제 당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과연 이 평가는 정당할까?
폭파 직후 미 군사고문단(KMAG)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6월 25일 98,000명이었던 국군이 7월 초에는 54,000명만이 남게 된다. 이는 한강을 넘은 국군 1사단 등 5개 사단 22,000명과 동부지역에서 전투 중이던 제6사단과 제8사단 병사를 합한 숫자라는데, 이를 뒤집어 보자면 전쟁 발발 일주일 사이에 44,000명에 이르는 병사들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 극동사령부의 전방지휘소 처치(Church) 준장은 6월 29일 전선을 시찰하던 맥아더에게 남은 한국군 병력은 25,000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국군 7사단의 경우 불과 500명, 국군 1사단은 5,000명만이 한강 이남으로 후퇴했으며 장비는 대부분 한강 이북에 두고 왔다. 2사단, 3사단, 5사단 역시 전투능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정이 되었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이로 보아 상황은 더욱 나빴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피해가 모두 한강교의 폭파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다. 1950년 6월 28일 행주나루로 통하던 고양의 능곡은 이미 후퇴하는 국군의 차량과 피난민들로 꼼짝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며, 이는 한강대교로 향하는 도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물밀듯 밀려나가는 피난대열 때문에 한강인도교 어구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어”라고 증언하고 있다. 중부경찰서 정보계장 조응선은 “서울역 앞에 이르자 아군의 철수차량이 한강교-서울역 사이를 5열종대로 초만원을 이루어 차량이동 속도는 도보이동이나 다름이 없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강철교나 한강대교는 이미 도로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것이고, 따라서 피난민이나 국군의 후퇴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피난민과 후퇴 군경으로 가득 찬 도로에서 어느 정도의 국군이 후퇴할 수 있었을 지 추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미군사고문관 세드베리가 말하는 10,000 병사가 후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더군다나 서울에 진입해 들어오는 인민군의 속도로 보면 더욱 비관적이다. 트럭을 타고 자정에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중부경찰서 경찰관들은 2시에 한강교를 건널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폭파직전 상황에서 서울역에서 한강인도교까지 2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강인도교를 이용한 국군의 철수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국군은 2사단 16연대 일부뿐이었다는 것에서 사실로 확인된다. 한편, 1사단 병사들은 처음부터 한강인도교를 건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책임인가?
채 총참모장이 명령을 내릴 당시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 등이 함께 있었다. 폭파 후 하우스만(James W. Houseman)대위 등 총참모장의 미 군사고문들은 채병덕을 따라 수원비행장까지 동행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에 의하면, 한강교의 폭파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총참모장의 판단은 돈암동에 인민군이 진입했다는 강문봉 대령의 정보에 근거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미 군사고문 하우스만, 김백일, 장도영, 장창국이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육군본부가 시흥으로 이동한 후 뒤에 남았던 김백일은 국군이 강을 건너야 하므로 한강교 폭파를 막아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장창국에게 폭파중단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즉, 이들은 총참모장의 명령을 알고 있으면서도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폭파를 멈추기 위해 중지도 위의 파출소까지 도착했으나 헌병과 공병의 제지로 명령을 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한강교 폭파의 목적은 국군 역량의 보존보다는 인민군 진격의 저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보아 국군 역량의 보존 때문에 총참모장의 명령을 어기려했다는 김백일에 관한 위 국방부의 서술이 사실인지 의문이 간다. 하지만, 국방부 견해대로라면 김백일에게도 폭파를 중단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것이므로 이 역시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한강교 폭파의 형식상 책임자는 총참모장임이 분명하지만 그가 떠나고 난 후 실질적 책임은 김백일에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전히 의문스러운 것은 하우스만 등 미 군사고문의 역할이다.
한편, 굴든은 한강교 폭파에 대한 명령은 국방부 차관 장경근이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교 폭파에 반대했으나 국방부 고위 관리(국방차관)와 김백일은 한강교 폭파에 찬성했다고 한다.
결국 이 사태는 1950년 9월 16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총살형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되었다.
그런데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사형집행에도 의문이 남아 있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1』(1977)에 따르면, 1950년 8월 25일과 26일 제6사단 전투지구인 경북 군위에서 아군공병대가 설치한 지뢰에 후퇴하던 제2연대 제3대대장 등 50여 명의 병사가 사상당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최창식 대령에게 묻던 중, 구속이유인 근무태만 외에 한강교 폭파책임을 묻는 ‘적전비행(敵前非行)’의 죄가 추가되었다.
최대령은 9월 10일 설치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며, 9월 15일 재판에서 근무태만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적전비행의 죄는 유죄선고를 받았다. 최대령에 대한 총살은 다음 날인 9월 16일 부산에서 집행되었다.
이런 결과에 대해 명령을 내렸던 채병덕 총참모장은 7월 29일 하동에서 이미 전사한 뒤였으므로 최대령이 그 총 책임을 지게 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최 대령 역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었으므로 직접적인 책임은 신성모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최 대령은 군법회의 판결의 재심재가 채택된 후 1961년 9월 재심이 청구되어 1964년 10월 23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절단되지 않은 2개의 한강철교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재판에서는 다루지 않았다지만 이것이야 말로 군인으로서는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가장 큰 책임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김백일은 다리가 폭파되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강인도교의 조기폭파 책임을 묻기 전에 폭파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2개 철교에 대한 책임을 물었어야 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도.
한강 복선철교는 1950년 8월 19일 미 19폭격전대 소속의 B-29 폭격기 9대가 퍼 부운 500kg 폭탄 54개(톤)와 해군 함재기에서 떨어트린 폭탄 8개에 의해서 끊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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