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십자군 원정

수미심 2016. 4. 6. 07:38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이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 부른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정열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의 원인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후 시리아는 동로마 통치하의 속주가 되고, 7세기 전반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라비아인에게 정복되었을 뿐 아니라, 638년 성도 예루살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성도로서 숭앙하는 생각이 점차 높아졌는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개인 또는 집단을 이루어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 무렵 동방의 이슬람 세계에서는 셀주크투르크가 세력을 신장시켜 비잔틴제국 영내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 ·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1092년 셀주크왕조의 통일이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 이 기회에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제국의 재흥을 꾀하여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알렉시우스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 하면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의 와중에 있었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방원정이라는 어려운 사업을 통하여 유럽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고, 비잔틴에서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 산하에 통일하려 했던 것이다.

 

 

 

 

▶제1회 십자군 원정

109511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공의회 회의석상에서 십자군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이 파견되었다. 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騎士)들로 편성할 예정이었다. 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멋대로 십자군에 대한 열을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은자(隱者) 피에르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동쪽을 향해 떠난 것은 농민을 대부분으로 하는 민중십자군이었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일단, 이어서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 양군은 헝가리 ·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에 건너가 투르크군과 싸움을 벌이기는 했으나 결과는 대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이밖에도 3개의 민중십자군부대가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개시된 것이다. 특히 라이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십자군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일찍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어단 유대인에게로 쏠렸는데, 거기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증오심도 깃들어 있었다. 3개 부대는 헝가리인의 공격에 의해 괴멸되었다. 정규 십자군은 1096년 여름부터 4개 부대로 나뉘어 출발, 육해(陸海) 양로를 지나 이듬해 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군세였는데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주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인과 노르만인이었다. 합류한 십자군은 니케아 공략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진군했는데, 그 길은 험난했다. 소아시아를 진군하는 동안 투르크인의 공격, 그리고 심한 더위와 굶주림 등으로 상당수의 인원과 말을 잃었다. 시리아에 도착하여 첫 공격목표인 안티오키아의 공방전에만 8개월이 걸렸다. 점령 후에도 전력 회복과 주변지역을 정복하는 데 6개월을 소비했으며 그 동안 유행병에도 시달렸다. 그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지휘자들이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부하들의 불평을 싹트게 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전면에 도착, 997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거기서 처참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십자군 병사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열광적인 신앙과 이교도에 대한 격한 증오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십자군의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십자군 병사들의 일부는 시리아에 정주(定住)하였다. 정복지에는 예루살렘왕국 ·안티오키아후령(侯領) ·트리폴리백령(伯領) ·에데사백령 등 4개국이 들어섰다. 또 왕국 안에는 요한기사단 ·템플기사단,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옮겨졌다.

 

 

클레르몽공의회 [Council of Clermont]

프랑스 중부 산지의 클레르몽에서 개최한 종교회의. 1130년까지 모두 7회 열렸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십자군을 전유럽에 불러모은 것으로서, 이것은 10951118일 ‘제1회 십자군’ 계획을 위해 우르바누스 2세가 소집한 회의이다. 참가한 고위 성직자는 약 3,000명에 이른다. 성직매매, 성직자 대처(帶妻)의 금지, 동방정교회 지원 등을 확인한 뒤, 회의는 공개석으로 옮겨, 청중을 앞에 놓고 교황 자신이 성지(聖地) 해방을 호소했다. 이에 감동한 청중은 “하느님, 가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앞을 다투어 출진허가를 얻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각지의 군후(君侯)에게 권고사(勸告使)를 보낼 것, 십자군은 옷에 십자군의 표지를 붙일 것과 십자군사에게 죄를 사하여 주고 그 재산은 3년 동안 평화로운 상태로 두어 교회가 이것을 보호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제2회에서 제4회까지 십자군 원정

1144년 에데사가 이슬람군에게 탈취되자 제2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지휘자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공격이 계획되었으나 시리아 주재 십자군 병사가 적측의 감언에 속아 전열을 이탈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두 국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였다. 12세기 후반에 이집트의 명군(名軍) 술탄 살라딘이 하틴전투에서 그리스도교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제3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 프랑스왕 필리프 2, 영국왕 리처드 1세 등이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강에서 빠져 죽었고 남은 군사만 시리아를 향해 진군하였다. 현지에서는 아콘 포위작전이 벌어졌는데도 필리프왕은 18개월 늦게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콘 공략 후 곧바로 귀국해버렸다. 리처드왕은 키프로스섬 정복 때문에 필리프왕보다 2개월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 후 리처드는 살라딘과 교전, 몇 개의 도시를 탈환하지만 예루살렘 해방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그리스도교도의 성도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 아콘은 시리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4회 십자군은 교황권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발동되었다. 군단의 편성은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최초의 십자군과 비슷하였다. 다만 먼젓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이슬람군의 거점이된 이집트가 원정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이에 대해 군대의 수송을 담당한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평화적 교역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수송비가 모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그들은 우선 달마티아의 츠아라를 치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부터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 내에 유리한 상업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최근의 정변으로 그것을 잃은 상태에 있었고 제노바와 피사에 눌려 있었다. 1204년 십자군은 정정(政情)의 혼란을 틈타 비잔틴제국를 무너뜨렸다. 수많은 성유체(聖遺體)와 보물을 약탈당하고 수도의 일부와 항만과 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그 밖의 비잔틴 영토도 십자군의 지휘자들에게 분할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 이 제국은 약 반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라틴제국 [Latin Empire]

1204년 제4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플랑드르백작 보두앵 1(재위 1204∼1205)가 제위(帝位)에 오름으로써 이루어진 국가(1204∼1261). 그는 십자군 기사들에게 봉토(封土)를 나누어줌으로써 봉건적인 질서를 확립하고, 소아시아의 북부와 트라키아 지방을 지배하였으나, 경제상의 실권은 베네치아인이 장악하였다. 2대 황제 앙리(재위 1205∼1216)는 황제권을 바로잡고 국력신장에 주력하였으나, 그리스인 국가들과 불가리아인, 알바니아인들의 저항을 수차례 받음으로써 국력이 쇠퇴하였다. 마침내 1261년 보두앵 2(재위 1228∼1261) 때 니케아제국의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구스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대신 팔라이올로구스왕조의 비잔틴제국이 재건되었다.

 

 

 

▶제5회 이후의 십자군 원정

5회 십자군은 또다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이 십자군은 아콘으로부터 이집트에 원정하고, 다미에타를 포위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시리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에 진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6회 십자군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프리드리히는 ‘세례를 받은 시칠리아의 술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라비아의 풍습에 매혹된 황제였다. 그는 무력이 아닌 외교수단으로 이슬람측으로부터 예루살렘과 그 밖에 영토를 양보받았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뒤에는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어 그 사이에 예루살렘도 잃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회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루이 9세는 키프로스섬에서 이집트로 건너가서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때에도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해왔으나 전과 같이 이를 거부하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으나 만슬러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시 시리아에 머물면서 약간의 항구와 요새를 탈환하고 철수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9세는 최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는데, 튀니스를 공격하였을 뿐 그곳에서 죽었다.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국가와 그 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십자군의 실패원인

1회 십자군의 성공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한 데에 큰 이유가 있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자 반격을 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와 종교기사단, 새로 도착한 십자군병사, 상인 등은 상호간, 또는 각 내부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영토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있었고, 또한 형성되어가고 있던 국민적 감정 등에 의한 대립이 얽혀 있었다. 또 십자군 국가에서는 소수의 정복자가 많은 피정복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초는 항상 흔들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무지와 광신과 편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들의 증오심만 부채질하였다. 그리스도교도를 성지로 가게 한 서유럽의 팽창운동은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십자군도 종말을 고하였다.

 

 

 

▶십자군의 영향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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