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와우 아파트 와르르

수미심 2015. 7. 16. 16:09

와우아파트 1970년, 4월 8일. 아파트가 무너져 내렸다. 아침 6시 반, 잠에서 채 깨지 않은 사람들 위로 아파트가 무너져 내렸다.<br>34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입은 이사고로, 시민아파트의 꿈도 함께 무너졌다.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30분. 서울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뉴스가 방송에서 흘러 나왔다. 서울시가 마포구 창전동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지상 5층, 15개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한 동이 푹석 주저 앉았다는 소식이다. 이는 준공된 지 석달 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건물은 무너지면서 가파른 경사 밑에 지었던 판잣집을 덮쳤다. 아파트에서 잠을 자던 주민 가운데 33명이 사망했고 38명이 다쳤다. 아파트 아래 판잣집에서 잠을 자던 1명도 세상을 떴다. 판잣집 주민 2명은 부상을 입었다.

시민아파트 건립의 꿈

와우아파트는 서울시가 마포아파트의 성공을 보고 서민들에게도 쾌적한 환경에서 거주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건설했다. 또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를 감당하려면 좁은 땅에 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싼 값의 서민아파트가 절실했다. 문제는 의욕이 너무 앞섰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서민아파트를 건립하려는 서울시장의 의욕이 비극을 낳았다. 당시 서울시는 돈이 부족했고 사람들이 살 집은 턱없이 모자랐다. 단기간 안에 주택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서울시는 1967년 4월 서울을 뒤덮고 있던 무허가 건물 13만 동을 양성화하겠다며 보조비를 지급했지만 개량 실적이 미미했다. 그래서 내놓은 카드가 시민아파트 건립이다. 서울시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공급해 9만 가구가 입주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속하게 입주까지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시는 아파트 골조만 짓고 나머지 내부 공사는 입주자가 담당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입주금 없이 가구당 20만원씩 15년간 대출해 주는 방법으로 돈이 없는 서민들도 쉽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서울시의 청사진에 대해 정부 뿐 아니라 시민들도 환영했다. 여기에 힘을 받아 서울시는 건설 가구 수를 더 늘려 잡았다. 하지만 전체 예산을 늘릴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건물당 투입되는 건축비는 점점 줄었다. 1개 동에 12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야 했지만 실제 660만원에 짓기도 했다. 당시 건설업계에 만연했던 부패도 문제였다. 이는 결국 총체적 부실 공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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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라는 표기법이 눈에 띈다.

와우아파트 공사현장(1969).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및 낙성대 상량식(1974).

이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을 건물은 없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 착공해 6개월 만인 12월 준공했다. 요즘 나온 첨단 건축 기술을 적용해도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려면 착공 후 2년이 넘게 걸리니, 초스피드로 건설한 셈이다. 와우아파트는 70도 경사의 산비탈을 견디는 기둥을 만드는데 필요한 철근을 7개에서 5개로 줄였다. 건물을 견고하게 하는 시멘트도 거의 섞지 않았다. 1㎡당 280kg밖에 견디지 못하는 건물 기초에 900kg의 하중이 실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을 건물은 없었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아파트 건설을 총 지휘했던 당시 서울 시장 김현옥씨가 물러났다. 구청장과 건축 설계자, 현장 감독, 건설회사 사장까지 책임을 지고 좌천되거나 구속됐다. 그 후 와우아파트는 부실 공사의 대명사가 됐다. 가수 조영남씨는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로 신고산타령을 바꿔 부르다가 ‘와우아파트 사건’을 부끄럽게 여겼던 박정희 정부의 기관원에게 끌려갔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은 서민들에게 싼 값에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해 건축비를 줄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공무원과 업체 간 부정과 비리로 기본 안전마저 무시한 결과였다.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건설 비리가 낳은 비극이었다. 이 사건 이후 서민 아파트 건립은 주춤했고 비싸지만 안전한 중산층 아파트가 전성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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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산 체육공원에서 내려다 본 전경.

와우산 자락 아파트 자리.

와우아파트의 비탈길은 여전하다.

와우아파트가 남겨준 것

와우아파트 이름은 실제 지명에서 따왔다.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지었던 아파트 자리에는 현재 와우산 체육공원 바위가 웅장하다. 초여름 저녁 오른 와우산 체육공원에는 홍익대 학생들이 농구공을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람들은 누워있는 소를 닮았다는 ‘홍대뒷산’을 오르며 간혹 와우아파트를 기억한다. 체육공원에서 만난 동네 주민은 와우아파트 있던 자리를 묻자 “공원과 비탈진 골목길 중간쯤에 아파트가 죽 들어서있었다. 이 산 밑에는 물탱크가 묻혀 있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 주민이 아파트가 있었다며 가리킨 곳을 따라가봤다. 산 자락 아래로 내려와보니 실제로 아파트가 설 수 있었겠다 싶게 터를 닦은 흔적이 있다. 산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만든 부분이다. 전체적인 지형은 언덕꼭대기에 산을 얹은 형태다. 경사가 급한 골목 초입에 세워둔 차들은 다들 45도 이상 기우뚱하다. 와우아파트 이후 ‘부실한 아파트’, ‘무너지는 집’이라는 악명을 지우기 위해 대한주택공사를 비롯한 건설업계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요즘은 지진과 충격에 강한 아파트도 등장한다. 건축 기술도 크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이 사는 집을 안전하게 지어야 한다는 양심이 기본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서민아파트의 꿈은 무너졌지만 아파트는 튼튼하게 건립해야 한다는 인식만은 확실하게 심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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