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합정동 유래

수미심 2015. 7. 16. 15:15

합정동에는 조개우물이 있었다 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합정동유래가 되는 조개우물은 지금의 절두산순교박물관이 세워진 근방인데 처형장이던 이곳에서

망나니들이 사형도구로 쓰는 칼을 갈고 물을 품기 위해서 팠던 우물이다. 우물바닥에 조개껍질이 많아서

조개우물로도 불렀는데 이 우물은 천주교인을 한참 탄압할 무렵 이곳에서도 고문을 자행할 때 사용되었다.

천주교인의 물고문용 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강변도로의 건설로 없어졌다.

 

합정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은 서울외인묘지공원과 양화대교 진입 인터체인지 및 한강시민공원과 절두산순교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양화대교가 놓여진 곳은 조선시대 서울을 출입하던 나루터인데 「동국여지비고」권2 산천조에 의하면 "양화도는 서강나루에 있는데 처음에는 나루지기인 도승을 두었으나 후에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고 관방조에는 "양화진은 1754년에 설치한 것으로 어영청 소속으로 별장이 있고 아장이 200명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외 각종 문헌에도 양화나루에는 나루지기가 있으며 방어를 위한 진(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한강진과 함께 서울 3진으로 요충지였다. 잠두봉 서쪽의 양화대교 동쪽지점인 양화나루를 큰나루라 하였으며 맞은편은 안양천이 유입되어 합류되는 지점을 연결하였다. 이 나루는 바다와 통해 있으므로 경상·전라·충청·경기도의 공세와 미곡을 서강의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전용항구였다.

 

조선초에는 용산강을 한강 으뜸의 항구로 쳤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하류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1591년의 기록이나 1636년의 기록에서도 수위가 얕아져 양화나루 이상은 배가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양화나루 근방은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절두산성당이라 부르는 곳은 마치 누에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두봉이라는 표현을 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정경은 그림과도 같았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용산서쪽에 마포·토정·농암 등의 강마을이 있어 모두 서해와 통하므로 8도의 배가 모여 들게 되어서 성내외 공후 귀족들이 모두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이와 잔치장소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강진에서 시작된 뱃놀이의 마지막 지점이 되는 잠두봉 아래의 양화나루에 대해서 명나라 사신 예겸이 "도성에서 서남으로 15리쯤 가면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라 하는데 대개 각 도에서 오는 군량이 와서 닿는 곳이다. 나루 어구에 푸른 돌이 수리나 되는 듯한 넓은 산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서 마치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섞여 서서 서로 마주한 것 같다.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이 좋았기에 걸어서 돌깔린 산마루에 올라가 소나무를 의지하여 모두 나무를 엮어 만든 난간에 기대고 바라보니 멀리 가까이 있는 돛단배들이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언덕 저 멀리에 기름진 논밭이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는 표현을 한 것을 보아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경치의 잠두봉 아래 모래밭은 조선 후기에 가면 일대변혁이 이루어지게 된다. 곧 앞서도 설명한 바 있듯이 천주교인의 대량 처형장소로 바뀌어졌던 것으로 후일 절두산천주교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합정동 96-1번지에 세워진 천주교 절두산순교박물관 자리에서는 병인박해 때 프랑스신부 9명과 남종삼바오르 등이 처형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면서부터 잠두봉은 절두산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강뚝에서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의 시체가 효수된 일도 있었다. 합정동 144번지에는 외국인묘지공원가 있다. 양화진 진대(鎭臺)의 뒷동산에 해당되는데 1885년 임금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다음해부터 묘를 쓰기 시작해서 약 500기의 묘가 있다. 입구 가까이 있는 것은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의 묘와 우리나라 종교계·교육계에 공이 많은 언더우드부부와 그의 친묘, 이화여대에 공이 많은 아펜셀러·앨리스·베백카를 비롯해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설립자 더글라스·비·에비슨의 묘도 있다. 또한 1991년 4월 17일에는 대한결핵협회장으로 한국결핵사업의 선구자 셔우드 홀이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망원정지」
망원정은1424년 효령대군이 지은 별장으로 1925년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89년 복원된 정자로 예전에는 '희우정'으로 불리웠다.(서울시문화재 기념물 제9호)

「잠두봉 절두산 성지」
조선후기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 등과 많은 천주교신자가 처형당한 곳으로 순교 기념관이 있다.(구가지정 문화재 제399호)

절두산유래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
(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수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함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마포구에 있는 동의 유래

▶ 노고산동

원래 산의 이름을 딴 동명으로 옛날 이 산에는 '쌍우물' 또는 '냉정우물'이라는 우물이 있어 물맛이 좋고 특히 눈병이나 속병에도 효과가 좋아 30리 밖 주민들도 이용할 정도로 유명 했으며 7년 가뭄에도 물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 당인동

임진왜란 때 현재 서울화력발전소가 있는 자리에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호칭이 당나라였고 중국인을 당인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 일대를 당인동이라 했다고 합니다.


▶ 도화동

도화동은 일대에 복숭아 꽃이 많이 피어 '복사골'이라고 불리어진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 동교동

동교동의 동명은 지형상 서교동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동쪽잔다리' 곧 '윗잔다리'라고 불러진 데서 연유되었는데 지명을 '마루터기 마을'이라고도 했으며 연희궁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하여 '궁동'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 망원동

망원동의 동명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신정동

신정동의 동명은 한성부 성밖 10리가 경제적인 면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인구가 밀집하게 되자 새로운 방이 신설되면서 생겼거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고향을 등진 전국의 실업자들이 한성에 모여들어 발전하는 가운데 신정동도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 아현동

아현의 지명은 우리말로 애우개 또는 애고개로 불리던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아이고개', '작은고개'라는 뜻으로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작은 고개를 '애고개' 즉 '애현'으로 부르던 것이 '아현'으로 된 것입니다.
이밖에도 서소문을 통해 나오는 어린아이 무덤(아총)이 많아서 지어진 지명이라고도 합니다.


▶ 연남동

연남동은 197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새로 생긴 동으로 연희동 일부를 떼어 마포에 편입시키면서 동명을 연희동의 남쪽이라 하여 '연남'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 염리동

염리동은 옛날 염전머리골에 소금배가 드나들면서 일대에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 용강동

용강동은 일대 지형 중 마포강이 마치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하여 불리어진 지명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공덕동

본래 이곳 일대가 만리현과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길 지대로 옛날 우리말로 '큰 더기' 또는 '큰 덕'으로 전해지던 것이 것이 한자음 '공덕'으로 옮겨진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 창전동

창전동의 동명은 조선시대 호조 소속의 세공미 창고인 광흥창 앞에 있던 동네라는 데서 유래

 

광흥창은 경기와 3남지방에서 세금으로 바친 쌀을 쌓아두었다가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던 곳으로 그 규모는

 

1년에 쌀 19,000석, 대두 18,000석을 보관할 정도의 대규모 창고였습니다.


▶ 중동

중동은 본래 여러 마을 중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운뎃마을" 또는 "간뎃말"로 부르던 우리말의 마을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합정동

동명유래가 되는 조개 우물은 지금의 절두산순교기념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처형장이던 이곳에서 망나니들이 칼을 갈기 위해 쓰기도 했습니다.


▶ 상수동

지역적으로 강가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이곳을 상수일리라고 한 데서 연유되었습니다.


▶ 상암동

상암동의 동명은 수색동 앞 넓은 들 건너 마을로 장마 때면 한강물이 이곳까지 넘쳐왔다고 하여 비롯된 곳으로 상수리와 휴암이라는 지명이 혼합되어 지어진 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 서교동

서교동은 옛날 골짜기에서 흘러내렸던 개울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던 지역으로 주변에 작은 다리들이 많이 놓여져 있어 마을 이름을 '서쪽잔다리(아랫잔다리)' 라고 하였으며 한강으로 가기 위해서 건너야 하는 작은 다리가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 성산동

성산동은 부근에 산들이 성처럼 둘러져 있어 우리말로 '성메' 또는 '성미'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 신수동

신수동의 동명은 신수철리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는데 '수철'이란 무쇠를 뜻하는 것으로 신수동 109, 110번지 일대는 무쇠막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입니다.


▶ 대흥동

대흥동의 동명은 동막하리를 대흥정이라 하여 1936년 서울의 구역을 확장할 때 편입되면서 비롯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