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남한산성①

수미심 2014. 7. 6. 03:41

남한산성① 함락되지 않은 비상시의 왕궁

연합뉴스 | 입력 2014.07.03 09:31 | 수정 2014.07.03 09:39

 

↑ (광주=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남한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인 지화문을 통해 관광객이 걸어 나오고 있다. 지화문에는 남한산성의 성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걸려 있다. kjhpress@yna.co.kr

↑ (광주=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남한산성의 5개 옹성 중 하나인 연주봉 옹성에서 바라본 남한산성의 모습. 산허리를 따라 산성이 조성돼 있다. kjhpress@yna.co.kr

↑ (광주=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조선시대 왕이 머물렀던 남한산성의 행궁. 인조 대에 처음 지어진 이후 순조 대까지 증축됐다. 현재의 행궁은 2012년 복원된 것이다. kjhpress@yna.co.kr

↑ (광주=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남한산성 행궁에는 왕의 집무실이었던 외행전과 침전이었던 내행전 외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다. 사진 왼쪽은 일장각, 오른쪽은 이위정으로 나가는 문이다. kjhpress@yna.co.kr

↑ (광주=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남한산성 곳곳에는 작은 홍예인 암문이 있다. 암문은 인조 대에 남한산성을 새로 쌓으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한다. kjhpress@yna.co.kr

(광주=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기도 광주와 하남, 성남에 걸쳐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약 1천400년 동안 산성과 도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다른 성과의 차이점도,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김훈의 동명 소설 탓인지 남한산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애처롭고 한탄스럽다.

소설에는 조선시대 전란이 터지자 도읍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인조가 세자, 신료들과 함께한 피란 생활이 그려진다. 성에 갇힌 조정은 47일 동안 항전하지만, 종국에는 치욕스러운 결과를 맞이한다.

그런데 사실(史實) 또한 소설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조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왕이다. 1623년 백부인 광해군을 쫓아내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추대해 옥새를 거머쥔 중종과 달리 인조는 정권 획득에 능동적으로 참가했다.

광해군이 역모 혐의를 씌워 친동생인 능창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이로 인해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인조는 등용되지 못하던 반대 정파를 모아 정변을 시도해 성공했다.

하지만 반정의 공식적인 이유로 사적인 감정과 욕심을 내세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새로운 세력은 형제의 목숨을 빼앗은 패륜적 행동과 그릇된 외교 정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이 권세를 지키기 위해 친형인 임해군과 어린 동생인 영창대군을 제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나, 외교 정책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광해군이 재위하던 즈음에 동북아시아에는 강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368년 건립된 명이 쇠퇴하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북방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임진왜란 당시 군사를 보내준 명에 대해 '다시 나라를 만들게 해 준 은혜'라는 의미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품고 있던 조선에게 후금의 부흥은 큰 위기였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중립 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광해군의 대척점에 서야 했던 인조는 명에 치중한 정책을 구사했다. 명을 패망시키려는 후금에게 '향명배금'(向明排金)을 고집하는 조선은 배후의 불안거리였다.

결국 후금은 1627년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침입했고,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하는 곡절을 겪는다. 후금 군대는 '다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이며, 양국은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는 조약에 합의하고 물러난다.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개칭한다. 그리고 조선에는 형제의 관계 대신 군신의 의를 강요하고, 왕자를 사신으로 보내 사죄하라는 압박을 가한다.

하지만 인조는 초지일관 이 같은 요구를 거부한다. 그해 12월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9년 만에 조선 정벌을 다시 감행한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신하고자 하나 적에게 막혀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몸을 옮긴다. 그날이 12월 14일로 호란이 재발한 지 2주 만이었다.

남한산성에는 인조 4년에 완공한 행궁이 있었다. 상궐과 하궐로 구성된 행궁은 창덕궁에 비해 초라했다. 왕과 백관들은 성을 둘러싼 적의 공격을 막아내며 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성에 보관된 식량은 고작 50일치에 불과했다. 물자를 들여올 길은 차단됐고, 겨울이어서 먹을거리를 조달하기도 쉽지 않았다. 청군은 성 밖에 위치한 높은 벌봉에서 성내를 감시하며 출입을 철저히 봉쇄했다.

그동안 사대부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싸운다고 해도 승리할 방도가 없었고, 강화에 나서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지부진하던 논의는 외부의 환경이 바뀌면서 한쪽으로 기울었다. 세자빈과 왕자들이 대피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인조는 마침내 성문을 빠져나와 오늘날 잠실 인근의 나루터인 삼전도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한다. 남한산성은 파괴되지 않았으나, 국가의 위세는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산성의 정수

남한산성은 한양도성, 수원 화성과 함께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성이지만 유래는 훨씬 유구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삼국이 통일되기 직전인 672년 신라가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투를 대비해 산성을 조성했고, 이 성이 남한산성의 효시가 된다. '주장'은 '낮이 길다'는 의미인데, 해발 500m 내외의 산봉에 에워싸인 산성 내부를 비추는 해가 길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주장성은 고려시대에도 보수를 거듭하며 사용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뚜렷한 기록은 없지만, 산성에서 고려의 기와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본격적인 재건은 수난의 주인공인 인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이뤄졌다.

국내외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느낀 인조는 1624년 축성을 명했고, 공정은 2년 뒤에 마무리됐다. 당시의 공사는 주장성 옛 터를 따라 다시 성을 건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물론 초기 산성보다는 정교한 이론과 발달된 기술이 도입됐다. 자그마한 비밀 통로인 '암문'과 적을 격퇴하기 위한 구멍 3개가 있는 '여장'이 이때 신설됐다. 암문과 여장은 한양도성과 수원 화성에서도 발견된다.

지금 남한산성은 타원형의 원성(元城)과 동쪽에 딸려 있는 외성(外城)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한양도성처럼 동서남북에 각각 대문을 두고 있으며, 전체 길이는 9㎞에 이른다.

동장대 터에서 벌봉과 한봉까지 연결되는 외성은 2.7㎞이다. 두 봉우리는 병자호란 때 청군이 점령한 요충지였는데, 훗날 숙종이 수비력 강화를 위해 외성을 쌓았다.

또 남한산성에는 성벽 바깥으로 길게 돌출된 구조물인 옹성도 5개 있다. 보통 옹성은 대문 앞에 둘러쳐 세우지만, 남한산성의 옹성은 대문에서 먼 성벽 외부에 지어졌다.

psh5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