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힐 것 각오하고 목소리 낸다".. '총경의 난'으로 번지나
김판 입력 2022. 07. 21. 09:58 수정 2022. 07. 21. 10:13 댓글 216개전국 총경들 사이서 비판 쏟아져
초유의 '전국 경찰서장 회의' 개최키로
댓글 600여개 쏟아져
일선의 경찰서장에 해당하는 총경 계급 간부들이 사상 첫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열기로 한 배경에는 지난 18일 윤희근 경찰청장 후보자가 주재한 전국 경찰 화상회의가 시발점이 됐던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국 신설 등 행정안전부가 내놓은 경찰 제도 개선안에 대해 윤 후보자가 반대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자 비판 의견들이 쏟아졌고, 대안 모색을 위한 자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행안부와 경찰청 지휘부의 일방통행식 여론 수렴이 결국 초유의 ‘총경의 난’을 불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정작 회의가 끝난 뒤 총경급들 사이에서는 “이런 식의 의견 수렴은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회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설명을 끝낸 윤 후보자가 “의견을 말해보라”며 몇몇 시도경찰청장들을 지목했는데, 지목받은 발언자들의 시선이 대부분 화면 아래쪽을 향했다고 한다. 이를 본 일부 총경들은 “미리 준비해둔 메시지를 읽는 것 같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조직 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사전에 조율된 내용을 시나리오에 맞춰 언급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발언권이 없는 총경들은 지켜볼 뿐이었다.
윤희근 경찰청장 후보자가 지난 18일 전국 경찰 화상회의를 소집해 발언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회의가 끝난 뒤 류삼영 울산 중부경찰서장은 경찰 내부망에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제안했다. 류 서장은 “공안직급 수준의 보수와 복수직급제, 그리고 일반식 승진 우대 등의 당근으로 불만을 무마하려고 한다”며 “경찰의 정치적 독립을 복지 수준 향상의 약속과 맞바꾸자는 제안은 전국 14만 경찰관들을 무시하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윤 후보자를 직격했다. 그러면서 “일선 경찰서장들의 의견도 충분히 들어보어야 한다는 생각에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긴급 제안한다”고 했다.
총경들이 지지와 동참 의사를 밝히면서 자연스럽게 ‘총경 단체 대화방’이 만들어졌다. 대화방에는 3일 만에 전국에서 400여명의 총경들이 모여들었다. 총경은 전국에 600여명 수준이다. 절반이 넘는 총경들이 지휘부의 화상회의에 비판적 문제의식을 표출한 셈이다. 대화방에 참석한 대부분의 총경들은 경찰국 신설 반대 의사와 함께 전국 경찰서장 회의 개최에 찬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류 서장은 지난 20일에 다시 한번 내부망에 접속해 “오는 23일 충남 아산 경찰 인재개발원에서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열겠다”고 공지했다. 이 공지글에는 21일 오전까지 60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여러 총경들이 자신의 실명으로 지지 의사를 표현했고, ‘서장님께서 나서줘 고맙다’는 소속 경찰관들의 댓글도 이어지고 있다.
류 서장은 이날 국민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경찰이 행안부의 지휘 통제를 받는 것은 조직 차원에서 아주 중대한 변화인데, 경찰 서장들의 생각이 어떤지 아무도 물은 적도 답한 적도 없다”며 “조직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일선 서장급 총경들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국 14만 경찰관들은 실제로는 257개 경찰서장들과 호흡하고 있다”며 “서장들은 본청 지휘부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장 경찰관들의 이야기도 지휘부에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집단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류 서장은 “결론을 정해놓고 모이는 게 아니다”며 “경찰 제도 개선과 관련해 경찰관들이 경찰 부속기관(경찰 인재개발원)에 모여 얘기하는 것은 집단행동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경찰서장을 지낸 이동환 경찰대 경찰학과장도 동참 뜻을 밝혔다. 이 학과장은 전화통화에서 “1991년 경찰청 독립은 개혁의 결과였다”며 “다시 행안부가 경찰을 통제하는 방안은 국민에 대한 도전이자 역사적 반동”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정치 권력의 개입이 위험한 이유도 설명했다. 이 학과장은 ‘용산 참사’ 사건을 언급하며 “정치 권력이 경찰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면 결국 현장에서는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물리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경찰이 외부로부터 압박을 받아 평정심을 잃으면 꼭 사고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행안부가 경찰국을 신설해 경찰 인사 업무를 보조하는 것에 대해 “행안부가 총경 인사의 목줄을 쥐게 되면 맨아래 계급인 순경의 목줄까지도 다 쥐게 되는 셈”이라며 “행안부가 결국 인사권을 통해 전체 경찰을 다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미 수백명의 총경들이 단체대화방에 참여하고 있고, 내부망에서 공개적으로 실명 의견을 표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총경들의 반발은 쉽게 수그러들 분위기가 아니다.
한 총경 인사는 “아무리 내부망이더라도 실명으로 댓글을 남긴다는 것은 사실상 공개적인 의견 표출”이라며 “승진을 앞둔 이들조차 ‘찍힐 것’을 각오하고 의견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이들이 개인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나서는 이유를 경찰청 지휘부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직장협의회 차원의 반발을 넘어서 경찰서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 반발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국 서장회의에 지지를 표명한 수도권의 한 서장은 “어떻게 하면 조직 내 갈등을 키우지 않으면서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지 고심이 깊었다”며 “이번 전국 서장회의가 총경들의 단순한 반발이나 경찰 내분으로만 비춰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어 “일선 서장들은 경찰청 지휘부와 직협의 입장을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지휘관”이라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경찰청 지휘부가 적극적으로 총경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내부의 반발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할 경우 윤 후보자의 리더십은 출발도 전에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기수를 뛰어넘어 몇달 만에 초고속 승진한 윤 후보자가 경찰 내부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면 전국적으로 경찰청장의 권위가 무시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며 “조직의 신망과 권위를 잃게 된 경찰 수장의 지휘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