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의 들깨밭에서 지난 13일 임순분 소성리 부녀회장(68)이 팔뚝만큼 자란 잡초를 뽑고 있다. 이날 임 부녀회장은 오전 6시 사드철회 집회에 참가한 뒤 오전 9시가 돼서야 밭일을 떠났다. 김현수 기자
농촌에서는 흔히 ‘농사는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새벽을 깨워야 한다’고 한다.
한낮 최고 기온이 35도를 넘나드는 탓에 새벽 일찍 농사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13일 오전 6시쯤 찾은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마을.
70가구 150여 명이 사는 성주 내에서도 작은 산골짝 마을인 소성리에는
여름이 왔지만 ‘새벽을 깨우는 농부’는 볼 수 없었다.
대신 새벽부터 마을회관 앞 도로에 ‘불법사드 철폐’라는 손팻말을 든 ‘농부’는 있었다.
2017년 4월 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가 임시 배치되고 5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드 기지로 통하는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다.
코로나19 사태는 ‘시위’가 일상이었던 이 마을 농부들에게 일상을 되찾아 줬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2020년 2월20일부터 정기적인 집회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사드 정상 배치를 위한 환경영향평가 등을 미루면서 쟁점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했다.
‘휴지기’에 있던 농부들이 농사일을 제쳐두고 다시 마을회관 앞 도로로 나온 것은 지난해 4월28일 소성리에 임시 배치된 사드 기지에 헬기로 공중 수송했던 공사 자재 등을 육로로 반입하면서다. 국방부는 같은달 14일 매주 2차례에 걸쳐 공사 자재와 물자반입 작전을 강행하면서 농부들의 일상은 또다시 1년 넘게 무너져 내렸다. 특히 지난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사드 기지 정상화’ 방침을 공표하면서 소성리 마을에 남았던 작은 희망도 사라지고 있다.
임순분 소성리 부녀회장(68)이 지난 13일 선풍기 앞에서 수확한 감자를 선별하고 있다. 이날 임 부녀회장은 오전 6시 사드철회 집회에 참가한 뒤 오전 9시가 돼서야 밭일을 떠났다. 김현수 기자
이날 집회에 참석한 임순분 소성리 부녀회장(68)은 단체에서 후원받은 곰보빵을 한 입 베어 물며 “사람 할 짓이 못 된다”고 했다. 열흘 전만 해도 집회 참석자에게 따듯한 밥 한 끼를 대접하기 위해 매일같이 40인 분 식사를 준비해했지만, 최근 농사일을 하다 쓰러진 뒤로는 주방일에 손을 뗐다. 한낮에 마늘을 수확하다가 더위를 먹은 뒤론 땅만 내려다보면 어지러움을 느낀단다. 임 부녀회장은 “마을 사람들이 내가 쓰러진 걸 알고는 절대 밥을 못 하게 한다”며 “집회 참가를 위해 멀리서 오신 분들에게 밥을 대접 못 해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는 오전 7시쯤 해산됐지만 임 부녀회장은 동네 어르신들을 모두 챙긴 뒤 오전 9시가 돼서야 밭일을 하러 나섰다. 집회가 열리는 매주 3일(화·수·목)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이 일도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논밭의 잡초를 뽑는 김매기는 매일매일 짬이 날 때마다 해야 하는 일이지만 임 부녀회장의 들깨밭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있었다.
임 부녀회장은 팔뚝만큼 자란 잡초를 뽑으며 “잡초가 이만큼 자라면 들깨가 영양분을 다 뺏겨서 씨알이 굵지 못하다”며 “하루면 다 하는 작업인데도 짬이 안나. 주말에 더 해야지”라고 말하며 일손을 재촉했다. 임 부녀회장의 들깨밭은 2000㎡로 600평 정도다.
참외 농사를 짓는 이석주 소성리 이장은 마음이 더 급하다. 해가 뜨면 비닐하우스 내부온도가 40~45도를 오르내려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날도 이 이장은 마무리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오전 7시쯤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끼니는 오전 집회 때 받은 곰보빵이다.
이석주 소성리 이장과 배우자가 지난 13일 자신의 참외 하우스에서 마른 잎을 자르는 순치기 작업을 하고 있다. 해가 뜨면 하우스 내부온도는 40~45도를 오르내린다. 김현수 기자
참외 하우스에서 마른 잎을 자르는 ‘순치기’ 작업을 하던 이 이장은 참외 수확시기인 지난해 5월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사드 기지에 공사 자재 반입이 시작된 시기다.
그는 “참외는 제때 수확하지 못하면 터져버려 상품성이 없어진다. 매년 5월에는 마을에서 품앗이로 수확시기를 맞춰 참외를 수확한다”며 “이런 걸 잘 아는 정부가 농번기에 맞춰 공사 자재를 투입했다. 아르바이트 써가며 시위했지만 남는 건 소환조사장 뿐”이라고 말했다.
주민과 사드반대 단체 회원 등 23명은 도로를 부수거나 교통을 방해한 혐의(일반교통방해죄)로 재판을 받고 있다. 임 부녀회장도 5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경찰은 주민 등 10명을 같은 혐의로 추가 조사하고 있다.
농부들은 주민들의 땅인 소성리 마을 길을 미군에게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또 일반환경영향평가 평가협의회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사드철회 성주대책위원회가 지난 13일 144차 불법사드기지 공사에 저항하는 집회를 진행하자 경찰이 강제해산 작전을 벌이고 있다. 김현수 기자
일반환경영향평가는 사드 기지 부지 70만㎡ 평가 작업으로 사드 체계 최종 배치 여부를 결정하는 작업이다. 국방부는 미국 측에 공여된 사드 부지가 약 32만여㎡라는 이유로 편법성 소규모 환경영향평가만 실시한 뒤 2017년 4월 임시 배치했다.
일반환경영향평가를 위해서는 평가협의회가 구성이 필수적이다. 평가협의회는 관련 법령에 따라 담당 지자체·지방환경청 공무원, 환경 관련 민간전문가, 주민대표, 환경부·국방부 소속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다. 평가협의회 참가 거부는 마을 주민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인 셈이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 4일 성주군에 주민위원 추천을 요청하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성주군은 지난달 24일 국방부의 1차 요청에 공무원 대표 1명을 추천했지만 주민대표 자리는 ‘추천 예정’으로 회신했다. 농부들의 반발이 심해서다. 공문은 현재까지 세 차례 발송됐다.
강현욱 사드철회소성리종합상황실 대변인은 “2017년 부지 쪼개기 꼼수로 진행한 소규모 환경평가는 5년이 다 된 지금까지 군사기밀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결과 발표도 못 하고 있다”며 “공군에서 레이더 정비사로 근무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부사관은 고등법원에서 공무상 재해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사드 레이더는 2000㎞까지 탐지하는 고출력 장비인데 휴대전화 중계기의 2만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는 말을 어떻게 믿느냐”며 “전자파 이야기를 하려면 최소한 전방배치 모드인지 종말기반 모드인지 밝혀야 하고, 측정지점과 출력대비 측정치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