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치 포장지 사놨는데, 다 버리란 말인가"
대전 동구의 한 두부 제조업체는 ‘400g 두부’ 포장재 주문을 앞두고 고민이 커졌다.
포장재업체가 요구하는 최소 주문량에 맞추려면 한 번에 479만원어치(두부 18만개 분량),
약 1년 2개월간 쓸 분량을 주문해야 하지만 선뜻 그럴 수 없는 처지다.
내년 1월부터 ‘소비기한 표시제’가 시행되면
유통기한이 표기된 절반 이상의 포장재를 다 내다 버려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회사 대표는 “두부 종류만 9가지라 포장재 변경은 수천만 원이 걸린 문제”라며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다른 식품업체들도 포장재 때문에 난리”라고 말했다.
식품의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바꿔 식품에 표시하는 ‘소비기한 표시제’ 시행을 6개월 앞두고 중소 식품업계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유통기한’ 표기 포장재를 대량으로 만들어놨던 식품업체들로선 기존 포장재 수년 치를 버리고 포장재를 새로 제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유통기한이 찍힌 기존 포장재를 소화하려면 충분한 계도·유예 기간이 필요한데, 주무 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이에 대해 아무런 지침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기한 표시제 앞두고 식품업계 ‘포장재 비상’
소비기한 표시제는 음식물 쓰레기 배출을 줄이려 도입됐다. 소비자들이 기존 유통기한을 ‘식품의 폐기 시점’으로 인식해 먹을 수 있는 식품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도 도입에 대해선 식품업계도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대부분의 식품업체에선 식품 포장재를 한 번에 수년 치씩 주문한다는 점이다. 포장재는 최소 주문량이 있는 데다가 한 번에 많은 양을 주문할수록 단가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영세한 식품업체일수록 제조 제품 수가 적어 포장재 소진율이 낮다. 정부가 소비기한 표시제 도입을 결정한 것은 지난해 8월이었지만 업체마다 1~2년을 더 사용할 수 있는 양의 ‘유통기한’ 표시 포장재가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한 김치 생산업체 윤병학 대표는 “기존 포장재를 쓰려면 일일이 ‘소비기한’ 스티커를 포장재에 붙이는 작업이 필요한데 인건비도 들고 너무 힘들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식품업계에선 “금리, 원자재 값도 다 오른 상황에서 폐기 비용까지 생각하면 목돈이 깨지게 생겼다”고 호소하고 있다.
◇식품업계 “충분한 계도 기간 달라”
식약처에는 “2년 치 포장재가 남아있는데 내년에도 유통기한이 표기된 포장재를 쓰면 안 되느냐” “기존 포장재가 동이 나 새로 제작해야 하는데 지금부터 소비기한을 적으면 안 되냐”는 내용의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한 단무지 제조업체 대표는 “포장지 제작업체에 ‘유통기한’ 표시된 걸로 6개월 치 분량만 제작할 수 없겠느냐’고 사정했는데, 안 된다고 한다”며 “결국 장사가 잘돼도 3년은 쓸 수 있는 포장재를 지난주 구매했다”고 했다.
식품업계는 소비기한과 유통기한 표기를 병행할 수 있는 계도 기간을 달라는 입장이다.
한국연식품협동조합 관계자는 “소비기한 표시제를 유예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계도 기간을 1~2년가량 충분히 줘 기존 포장재를 버리지 않고 소진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겠다고 시행하는 제도 때문에 수많은 포장재가 쓰레기로 버려진다면
제도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느냐”고 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계도 기간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지만
하반기 업체들의 준비 상황을 조사해 계도 기간 마련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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