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 날개를 펴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길지(吉地)이다.
정도전의 묘는 학의 머리 부문에 있다. ” -서초구의 <향토사료>에서
조선 건국의 1등 공신 정도전이 처음 묻혔던 묘소의 그 터에 대한 풍수지리상 해석이다.
그 터는 우면산 끝자락에 있다.
지하철 양재역 12번 출구로 나가서 서쪽으로 직진하면 서초구청과 국립외교원 사이
왼쪽으로 제법 큰길이 나 있다. 이 사잇길로 우면산 쪽으로 올라가면
왼쪽에 양재고등 학교를 만난다. 양재고 정문 앞이 서초동 산 23의 1 쌈지공원이다.
그 공원 왼쪽 입구에 ‘삼봉 정도전 산소 터’ 푯돌이 있다.
그 푯돌은 오석(烏石) 두 개로 세 봉우리를 흉내 냈다.
정도전의 호 삼봉(三峯)을 뜻하는 것 같다.
그의 호 삼봉은 외가가 있던 충북 단양의 도담 삼봉에서 땄다는 설과
서울 삼각산이라는 설 등이 있다.
왼쪽 봉우리에는 삼봉 정도전 산소 터(鄭道傳 1342~1398)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두 봉우리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삼봉 정도전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통한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꿈꾸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국을 건국하였다.
민생의 안정과 풍요를 정치의 최고 가치로 삼았던 정도전의 산소가
이곳 서초에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여기에 삼봉의 민본사상을 기리는 빗돌을 세운다.
2013년 11월 8일 서초구청장 진익철 ’
푯돌 하단에 묘의 위치를 밝히는 문헌을 인용해 이렇게 옮겼다.
“동국여지 과천현 편
‘鄭道傳墓在縣北東十八里 良才驛在東十五里’
현 위치: 서초동 산 23~1번지 서초구 청사 일대 ” 반계 유형원이 지은 동국여지이다.
과천현 편에 실린 글을 풀이하면 이렇다.
“정도전의 묘는 과천현에서 동쪽으로 18리, 양재역에서 동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다”
정도전 후손들은 우면산을 뒤진 끝에 이 묘역을 발견했다.
1989년 한양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해 묘 3기를 발굴했다.
1호분에서 몸통이 없는 머리 부분 유골이 나왔다.
이는 왕자의 난 때 참수됐다는 실록 기록과 일치했다.
2호분은 부인 최 씨의 묘로 추정됐다. 조선 초기의 고급 백자도 함께 출토됐다.
결정적 물증인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가 도굴된 상태였다.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 발굴팀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유골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189 정도전의 사당 문헌사 부근에 모셨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7 옛 종로구청 민원실 앞에 삼봉 정도전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었다.
종로구청사는 신축 공사 중이다.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수송동)에 있었는데
지금 중학(서울에 설치된국립 중등교육기관)이 자리 잡은 서당 터는 정도전가의 서당 자리요,
지금 제용감(왕실용 옷감과 의복의 염색 직조를 담당한 관청) 터는 정도전가의 안채 자리요,
사복시 (궁중에서 사용한 말과 가마를 관리 하는 관청)는 정도전가의 마궐(마구간) 자리인데
모두 풍수설에 맞춰 지은 것이다.”
옛 종로구청, 종로소방서와 서울지방국세청, 코리안리재보험, 석탄회관 이마빌딩에 걸친 지역에
그의 집이 있었다.
정도전이 비참하게 죽은 이후 그의 저택도 잘게 쪼개졌다. 그의 서당은 중학당으로 되었다.
일제강점기 수송초등학교를 거쳐 옛 종로구청으로 흘렀다.
마구간은 궁중 마구간 사복시가 되었다. 그후 경찰기마대를 거쳐 이마빌딩으로 맥이 이어졌다.
안채는 제용감에서 불교관리 기구인 사사관리서, 황성신문 사옥, 농상공학교, 수진측량학교 등
수많은 기관과 단체가 지문을 남겼다.
사학자 이덕일은 정도전의 죽음으로 요동 정벌의 원대한 꿈이 좌절된 것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태조 7년(1398) 8월 이방원은 이성계가 와병 중인 틈을 타서 전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방원과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정도전은 남은의 첩 소동의 집에서
이직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가 살해된다. 그만큼 전격적인 쿠데타였다.
정도전뿐만 아니라 남은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 북벌을 주장하던 인물들은 모두 살해됐다.
새 나라 개창에 성공했던 정도전이 꿈꾸었던 요동 정벌은 이렇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모든 백성에게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히려 했던 정도전,
요동 수복을 꾀했던 그의 꿈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덕일의 <한겨레 21 칼럼>
‘하룻밤에 잘려나간 북벌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