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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

수미심 2022. 6. 7. 06:10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그날이 한으로 남았습니다

정은주 - 어제 오후 8:00
© 제공: 한겨레일러스트 김대중
© 제공: 한겨레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그날이 한으로 남았습니다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고인을 그리는 추모편지를 독자분들이 보내와 그 일부를 지면에 싣습니다.

전문은 온라인 추모소 ‘애도’(www.hani.co.kr/interactive/mournin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추모편지를 읽고 헌화하고 방명록 글도 쓸 수 있습니다. 추모편지를 6월 내내 접수합니다.

고인의 삶을 돌아보고 그리움을 전하는 글을 이메일(missyou@hani.co.kr)로 보내주세요.

분량은 200자 이상으로, 형식은 조사·편지 등 제한이 없습니다.

고인 또는 고인과의 추억이 담겨 있는 사진을 함께 보내주시면 소중하게 싣겠습니다.

故 이길남
© 제공: 한겨레어린 시절 고 이길남씨. 첫 손녀딸 제공.
보고 싶은 할아버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어요. 할아버지의 확진 소식을 들은 날.
전국 중환자실 병상이 모자라 맘 졸이며 기다리던 새벽.
선별진료소의 긴 줄에서 2시간 넘게 펑펑 울며 기도했던 시간.
오직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생각만 했던 격리 기간.

그리고 마지막 날, 2021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한달 만에 마주한 그 얼굴과 내가 잡은 싸늘한 손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입관식에서, 마지막으로 안았던 품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도 할아버지, 나는 그보다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어주던 얼굴, 나를 배웅하며 창밖으로 손 흔들던 모습, 내 얼굴을 쓰다듬던 단단한 손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어요.

마지막 작별인사 할 수 있게, 격리해제가 되실 때까지, 20일 동안, 긴긴 시간 아픔을 참고 우릴 기다려줘서 고마웠어요. 그토록 꿈꿨던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세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단 하루도 할아버지를 잊은 적 없어요. 지금도 우리 곁에 있고, 언젠가 다시 서로의 품을 안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다시 만날 땐 14년 동안 듣지 못했던 내 이름 꼭 들려주세요.

―고 이길남님 가족을 대표하여, 첫 손녀딸 올림.

故 김○○
코로나는 제게 너무 큰 아픔을 남겨준 병균 원수입니다. 발병되시고 불과 하루 만에 사경을 헤매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힘들게 호흡하시던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병원 가셔서 단 한번 어머니와 눈인사 한번 주시고 그리 가실 줄 몰랐습니다. 병원 치료 열흘 동안 면회 한번 못 하고 병간호 한번 못 해드리고 수면 치료로 계속 주무시다 열흘 만에 임종 면회로 주무시는 얼굴 한번 뵈었지요. 임종하셨다 하여 임종 선고 후 얼굴도 못 뵙고 장례식장으로 모시고 입관 시 대면도 안 된다는 말에 격분하여 억지로 대면하였습니다. 살아 계실 때 지어놓은 그 좋은 안동포도 못 입혀드리고 임종 시 모습 그대로 입관하여 화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황당함을 넘어 울분에 목이 메어 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그날이 제 평생에 한으로 남겨져서 지금도 울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故 강○○
저희 할아버지는 작년 말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이른 아침부터 서울에서 안동까지 달려갔지만 직계 아들, 딸 2명을 제외하고 모든 면회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요양병원 내 직원들의 출퇴근은 되면서 임종이라는 마지막은 왜 들어갈 수 없는지 원망만 했습니다.
故 ○○○
6남매의 어머니이자 17명 손주의 할머니였던 우리 할머니. 요양원 안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웠을까요.
故 박태평
명복을 빕니다.
故 정유엽
© 제공: 한겨레고 정유엽군의 일기. 엄마 제공
엽아, 너가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 엄마는 어릴 적 너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혼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단다. 얼마 전 큰형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쓴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에는 거의 보물을 찾은 듯 기뻤단다. 20년 전 그 낡은 형의 일기장 속에 너와 형이랑 처음 태동을 통해서 첫인사를 나누었던 장면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야. 우리에게 너의 존재는 너무나 소중한 선물과도 같았단다. 오늘 이 자리에서 형과 너의 일기장을 너의 허락 없이 공개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니?

―유엽이 엄마

故 이학근 베네딕토
© 제공: 한겨레故 이학근 베네딕토 신부. 유민숙 제공
신부님께서 여러 기저질환이 있으신 와중에도 코로나 고비를 잘 넘기시는 것 같아서 내심 안도했었는데, 결국 코로나가 신부님의 쇠약한 육신을 덮쳤을 때 너무나 마음이 아팠어요.

―강원도 원주에서 유민숙 데레사 드림

故 ○○○
“할아버지, 잘 가요.”
故 ○○○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두번의 제사상과 세번의 차례상을 차렸다. 평소에 제사를 왜 지내는지 모르겠다며 제사 보이콧을 했던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진짜로 저승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저승이 있다면 죽은 사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승으로 간 것일 뿐이라고, 할아버지는 먼저 떠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서 바쁘게 노느라 이승은 생각나지도 않을 거라고 말이다. 병풍을 접고 제기를 정리하면서 다음 제사상에는 평소에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단팥빵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故 이은자
남편과 딸이 거의 동시에 직장에서 코로나19에 감염이 됐고, 사흘 후에는 한집안에서 생활하던 나도 연이어 환자가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쇠약해지신 90살 노모의 건강을 염려하던 남편이 평소보다 자주 서울과 시골집을 오가던 시기였지요. 아무런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 코로나19에 감염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마음 편하게 주말에 어머님을 뵙고 온 남편이 갑자기 피곤하다며 내게 몸살약을 부탁하기 전까지는, 코로나 월드에서 비켜난 듯 안온한 겨울을 보내던 중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의 감염 사실이 획인되자 어머님도 즉시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셨고 결과는 양성. 어머님은 확진 판정을 받으신 후 일주일여 지나 기침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산소포화도가 낮아져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셨고, 입원 다음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빠가 운명하시기 전날 밤, 코로나 병동의 담당 간호사는 전화 통화라도 할수 있게 해달라는 엄마의 간곡한 요청에 도움을 주셨다.
 
나는 지내면서 모든 순간순간이 아빠 생각으로 가득해.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 티브이 프로그램, 노래가 나오면 또 슬퍼지고… 가끔은 문득 ‘나는 아빠가 없네’라고 생각이 들면 갑자기 슬퍼지고 또 그립고 보고 싶다. 꼭 다시 만나자. 사랑해.
 
마지막 의료인으로 최선을 다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어머니! 원통합니다. 애통합니다. 그리고 억울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이 원과 한을 다 푼단 말입니까? 하늘보다 크고 태산보다 무거운 원과 한을 홀로 짊어지신 채 그 멀고도 험한 요단강을 어떻게 다 건너셨나요? 자식조차 외면하며 손잡아 주지 않던 험한 강을 무엇에 의지하여, 무엇을 등대 삼아, 누구를 동무하여 건너셨나요? 어머니! 이 불효를 다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피눈물이 납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너무 아쉬워 자꾸 뒤돌아보게 되네요. 인공호흡기와 에크모가 코로나 중증환자가 마지막 할 수 있는 치료다, 이렇게 얘기했더라면 누가 인공호흡기 치료를 마다하겠습니까? 중환자실 가서 인공호흡기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연명의료 동의서 작성해주셔야 합니다. 이리 의료진이 알려줬더라면….
 
 
‘일해야 산다.’ 처음 제가 어머님 댁을 방문진료 갔을 때 마루에 걸려 있던 가훈입니다. 돌아가신 남편분의 좌우명이기도 했다는 그 가훈을 보며 살아오신 삶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할 때였는데도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지 가늠이 되었어요. 그 가훈처럼 어머님은 침대 가까이 와 있던 죽음과도 정말 열심히 싸우셨습니다.
 
둘째 고모부는 운동과 식단관리 병행으로 최근까지도 골프를 치시고, 경로당을 오가는 등 바깥 활동을 해오셨단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 확진으로 병원에서 격리된 것이다. 가족들은 그 이후 둘째 고모부를 뵐 수 없었고, 병원으로 모신 지 14일 만에 둘째 고모부의 사망한 모습을 유리벽 비대면으로 만나게 되었다. 고운 수의와 노잣돈은커녕 화장하기 전 새파란 알몸을 마주한 가족들은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영하 형님. 여러 친구 잘 사귀시고 잘 계세요. 먼 곳이 그리우면 가슴 부풀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아무 때나 사철가 부르지 말고….
 
 
형님, 이제 하늘나라에서 늘 그리던 어머님 재회하시고, 김근태 형님 김병곤 형님 이범영 형님 김선택 형님 등 만나 회포 풀며 정담도 나누시고, 그렇게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쉬십시오.
 
 
아버지, 금방 사라질 줄 알았던 코로나는 그렇게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더니, 아버지와 이별하고도 2년이 훨씬 지나서야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네요. 그리고 그토록 기다리던 소중한 일상회복에 한발씩 다가가고 있어요. 코로나 확진으로 한달 넘게 병상에 계셨던 어머니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셨죠. 중증으로 발전하는 위기까지 갔었지만 다행히 의료진이 잘 돌봐주셔서 회복의 단계로 갈 수 있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도 지켜주셨기 때문에 회복이 가능했다고 말씀하시곤 하세요.
 
 
 
 
우리 사회가 당신을 이렇게 떠나보내게 되어 미안합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애도하겠습니다.
 
 
코로나19뿐 아니라 각종 전염병, 사회적 질병들로 인해 가족을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의료발전이 좋아져서 최고라며 걱정하지 말라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보고 싶다고 하시더니, 결국 끝내 돌아오지 못한 우리 아빠.
 

 

아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울컥도 한다. 왜 이제야 아빠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된 거지…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빠를 그땐 놓치지 않을 거 같아. 아니 놓치지 않을 거야.
 
 
배정된 낯선 병원에서 가족 면회조차 금지된 상황으로 홀로 얼마나 외롭고 무서우셨어요.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한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면 오늘도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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