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말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하는 말이다.
정주영 사장은 비사(祕史)를 밝히고 있다.
“나는 소양강댐 부근에 무진장으로 널려 있는 모래와 자갈을 생각했다.
나는 세계굴지의 교에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도 모험이다.
현대 편은 하나도 없다. 관료들과 일본이 연합하여 현대가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
몇 번의 연석회의를 하였지만 나는 나의 주장을 양보하지 않았다.
현대 정주영 사장 때문에 큰 일이라고 비난이 계속된다.
만약에 126m의 댐에 이북에서 폭격이라도 하면 끝장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포병장교 출신이다.
결국 대통령께서 사력댐으로 재검토 지시가 떨어졌다.“
소양강댐은 당초 예산의 30%를 줄여 사력댐으로 설계를 바꿔 공사에 들어갔다.
‘소양강 다목적댐 준공 기념탑’이 입구에 우뚝 솟아 있다.
정상길에서 보면 댐 상하류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양강댐 오른쪽의 정상길에 서면
댐 상류로는 거대한 호수를, 하류로는 춘천 시내로 흘러가는 소양강을 시원스레 볼 수 있다.
정상길을 되돌아 와 선착장 방면으로 몇 걸음 옮기자 까만 돌(오석)에
‘소양호’라 새긴 비석이 있었다. 1973년 9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유의 반듯한 글씨체로 쓴 휘호다. 박 대통령은 댐 공사가 끝난 후
72년 11월 25일 담수식에 참석해 치사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 어록이 담수식 기념비석에 담겨져 있다.
”우리 인간이 대자연에 엄청난 도전을 하여 인간의 의지로서 자연을 극복하고
개가를 올린 산 증거가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1970년), 서울지하철 1호선(74년)과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챙긴 3대 국책사업의 하나였다.
총 사업비 321억원이 투입된 소양강댐은 67년 4월에 착공, 6년 6개월 만인
73년10월 15일 준공됐다. 소양강댐 사업비 321억원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6614억원에 달한다. 67년 댐 착공 당시 정부 예산은 1643억원에 불과했다.
건설 당시 소양강댐은 동양 최대, 세계 4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60년 4대강 유역종합개발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소양강댐은
처음엔 상공부 안대로 수력 발전용 댐으로 설계됐다.
건설부가 용수 확보를 위한 다목적댐을 주장했다. 논쟁 끝에 박 전 대통령이
건설부 안을 받아들여 수정됐다. 또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설계됐으나
공사를 맡은 현대 정주영 회장이 현장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과 모래·자갈 등을 활용해 만들자고 제안해 변경됐다. 당시 철근 시멘트 등
건설자재 생산능력 부족과 열악한 도로 사정에 따른 자재운송 문제, 비용 절감
등이 변경 사유였다. 시멘트에 비해 외부 충격에 강하다는 것도 이유였다.
소양강댐은 연 12억t의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수도권 물 공급량의 45%에 달한다.
78년을 포함해 다섯 차례 전국적인 가뭄이 있던 해에도 수도권에 안정적으로
용수를 공급했다. 소양강댐은 5억t의 홍수 조절 능력을 갖췄다.
한강 인도교 수위를 1.69m까지 조절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댐 안쪽의 최대 수심은 120m가 넘는다.
소양강댐은 20만㎾의 시설용량을 갖춰 연간 353Gkw 무공해 전력을 생산한다.
특히 73년 11월 제1차 석유파동으로 심각한 전력난을 겪고있는 상황에서
소양강댐은 전국 수력발전 총량의 30% 정도를 분담하면서 전력난을 해소했다.
1967년에 착공한 소양강댐은 617만명이 동원되어 6년 6개월에 걸쳐서 1973년에
동양 최대의 사력(砂礫)댐으로 준공하였다.
경부고속도로공사가 1년 5개월인 점을 보면 소양강댐 공사는 대단히 큰 공사였다.
소양강댐 만수위 때 면적이 70km²로 서울 여의도 면적(2.9km²)의 24배나 된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소양감 사력댐이다.
준공 당시 한 일간지 신문은 댐을 두고 “123m의 인조산(人造山)’이라고 표현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댐 축조에 들어간 진흙과 모래, 돌을 모두 합쳐 960만㎥나 된다.
이 수치는 3500만 국민 한 사람이 7가마니씩의 자갈과 흙을 져 날라야 하는 양이라고 한다.
소양강댐은 박정희 정권과 우리나라의 자부심이었다.
소양강댐은 경제 발전의 상징적 존재였다. 50.21㎢가 수몰됐다.
1만8546명(3153가구)이 고향을 떠난 어두운 측면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환경생태 변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도 관심을 갖고 해결해 나갈 과제의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