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씨 부인은 사언(士彦) 사기(士奇) 두 아들을 낳았다.
양희수는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楊士俊)을 두었다.
사언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용모와 풍채도 아주 좋았다.
세상 사람들은 ‘신선의 풍채, 도인의 기골’이라며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칭송했다.
그의 모친은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이에 힘입어 양사언은 공부와 글씨 쓰기에 전념하며 자신의 기량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양희수의 세 아들은 모두 재주가 아주 뛰어났다.
이 세 아들은 중국의 소동파로 널리 알려진
소순(蘇洵)소철(蘇轍) 형제와 아버지 소식(蘇軾)등 삼부자 '삼소(三蘇)'와 견주어 칭송을 받았다.
소식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세월이 흘러서 정실부인이 죽었다. 양희수는 첩실 유씨 부인을 후처로 삼아 아들들을 돌보게 했다.
조선의 국법상 첩의 신분으로 낳은 아들은 영원한 첩의 자식이었다.
“애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뭣하냐 서자들인데,....” 소실 유씨의 서러움과 한탄은 갈수록 깊어갔다.
그의 꿈은 자기 아들들의 머리에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양희수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던 날 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유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그는 정실부인의 아들 양사준에게 간곡히 청했다.
“제가 낳은 아들이 사람됨이 그다지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하오나 우리나라 풍속에 천한 서얼로 태어나면 제아무리 어른이 될지라도 어디에 쓰이겠습니까?
도련님이 비록 격의 없이 은혜와 사랑을 주고 계시지만 제가 죽고 나면 서모의 복을 입으실 겁니다.
그리되면 적서의 구별이 현격한 지라, 저 두 아이가 장차 어떻게 행세를 하겠습니까.
제가 오늘 자결을 하여 나리마님의 상중에 임시방편으로 함께 장례를 치른다면
아마도 적서의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어른들께서는
이 사람을 가엽게 여기시어 저승에 한을 품고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문총화(記聞叢話)>에서
유씨 부인은 자신이 죽을 테니 대신 아들을 서얼 취급을 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유씨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고 만다.
아들들이 달려가 유씨 부인을 안았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들이 쓴 멍에를 풀어 주고자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린 그 어머니의 모습이다.
참으로 비장하고 섬뜩한 모정이다. 그의 부탁대로 집안에서
사언 사기 두 서자를 친자식처럼 대우했다.
후일 사람들도 사언 형제를 서얼인 것을 몰랐다고 한다.
두 아들은 드디어 신분 상 광명을 찾았다.
양사언은 조선 명종1년(1546) 대과에 장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다.
양사기는 명종 7년(1552) 과거에 급제해 호조좌랑을 거쳐
7개 고을 수령을 역임하며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양사언은 한석봉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양사언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어머니 자결의 충격 탓인지 스스로 외직을 자청하여 산수 경관을 즐기며
시를 짓고 글씨 쓰는 것을 한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그는 안변군수로 있으면서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하였다.
이듬해에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서 많은 군대가 북송될 때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서 관리나 백성들이 책임을 추궁 당하여
사형을 받는 자까지 있었으나 안변만은 아무 걱정 없었다.
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 누구나 탄복하였다.
얼마 안 되어 지릉(智陵)에 화재가 일어나니 그 책임 때문에 해서(海西)에 귀양 갔다.
그는 2년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는 길에 병사했다. 선조 17년(1584) 68세였다.
양사언이 남긴 금강산 시 한 편이다.
서리 녹아내린 물 계곡으로
흘러가고/바람에 진 나뭇잎도
산으로 돌아가네/ 어느덧 세월
흘러 한 해가 저물어 가니/
벌레도 모두 다 숨어 움츠리네.
霜餘水反壑 風落木歸山
冉冉歲華晩 昆蟲皆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