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남연군묘

수미심 2014. 8. 12. 05:13

  남연군묘         

남연군묘
남연군묘

남연군묘

남연군묘는 옥계리 안 석문봉 능선 끄트머리에 있다. 옥계리는 가야산 산행깃점이고 남연군묘는 산행 초입에 있어서 묘를 지나야 산을 오를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이나 서산마애삼존불이 국보라는 점에서 볼만한 가치를 가진 문화재인데 비해 남연군묘는 문화재는 물론 아니고 왕릉도 아닌 한미한 왕족의 일개 무덤일 뿐이다. 그런데 남연군묘에 서면 한 시대의 영욕, 운명, 국운, 숱한 인간의 부침, 역사의 아이로니가 한꺼번에 느껴져서 만감이 교차한다.

남연군은 근세 조선의 운명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이다. 대원군이 빛을 보지 못하던 시절 어느날 한 사람의 지관을 만난다. 그의 이름은 정만인이었다. 그는 대원군에게 충청도 덕산땅에 두 사람의 천자가 날천하의 명당이 있다고 말한다. 대원군이 반 한량으로 난초나 치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의 말을 받아들여 경기도 연천땅에 묻혀있던 아버지를 여기에 이장한다.

원래 묫자리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였다. 절을 불태우고 앞뜰의 탑마저 무너뜨린 뒤 묘를 이장했다. 그 음덕을 받았는지 대원군은 후일 대원군이 되어 대권을 쥐게 되고 그의 아들 고종, 손자 순종등 두 사람이 왕위에 올라 지관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러나 남연군묘는 대원군 개인에게는 영화와 권세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그보다더 나라의 운명이 잘못되는 고리 역할도 했다.

독일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에게 통상요구를 했으나 이를 묵살한 보복으로 남연군묘를 파헤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생각나는 것은 최근(1999년 3월)에 일어난 어느 재벌의 부친묘를 파헤친 엽기적인 사건이다. 우리 나라의 매장문화와 선조를 공경하는 보편적인 정서에 비추어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충격은 단순한 분묘 발굴 이상의 사회문화적인 파장을 몰고 왔다.

오페르트가 대원군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이 분묘발굴은 우리의 조상숭배관습을 정확히 꿰뚫은 것으로 발굴이 실패하자 그것이 준 충격은 엄청났다. 오페르트에게 분묘발굴이 가져올 영향 및 충격과 파장에 대한 일체의 지식을 제공한 것이 천주교 신자라고 생각한 대원군의 그 뒤의 행보는 1만여명이 죽는 천주교 대박해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 됐다. 그뿐 아니라 쇄국 정책을 유지시킨 원인도 여기에서 추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란 만일(if)를 허용하지 않는다지만 대원군이 이곳 가야산 자락에 아버지를 이장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조의 말기는 보다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연군묘 주변의 산세

남연군묘에 서면 이곳이 풍수가들이 말하는 명당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에 이의를 달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보인다. 풍수산도를 보면 중앙에 석문봉이 있으나 실제로 좌향을 보면 능선 직후방에 솟은 봉우리는 옥양봉이다. 남연군묘와 옥양봉은 능선으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남연군묘와 직접 연결된 봉우리는 석문봉인데 이 봉우리는 남연군묘에서 직접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사실과 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흐름이 거의 끊기다시피한 다음 마지막에 솟아 올라 분묘가 있는 명당을 형성케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을 풍수가들은 뭐라고 설명하는지 모른다. 문외한에게는 그것이 의문이었고 그 때문에 대원군의 운명과 그의 후예들의 운명 그리고 나아가서 조선의 운명이 다하고 만 것은 그런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한남금북정맥이 바다에 가라앉기 직전 형성된 혈이라는 조건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게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곳에 묘지가 많은 것은 풍수가들의 말이 국토를 왜곡시키는 현장이라고 말한다면 과언일까?

출전 : http://www.kormt.co.kr/sosanjidae.html

참고 : 정경연의 풍수지리적 해석                      이전 위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