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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자폭탄

수미심 2013. 11. 6.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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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이 떨어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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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전 대륙이 제2차 세계 대전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불길속에 싸여있을때,
안일하고 태평스러운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난데없이 재빠른 비행기 편대가 나타났다.
잠시후.. 시가 상공을 배회하며 누비던 비행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얀 삐라(쪽지)를 하늘에 날렸고, 
수평선 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온 시민들은 갑자기 뿌려진 삐라를 들고 우왕좌왕 방황하기 시작했다.
사실인즉 조그만한 종이 쪽지는 미공군에 의한 것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경고의 글이 실려 있었다.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경고한다! 

 

 모든 시민은 8월6일 아침 10시 이전까지 반경 50km 밖으로 대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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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며 무사 안일했던 수십만의 시민들은 영문 모를 경고장 에 대하여 
각기 나름대로 가슴을 조여가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떤이는 "이것은 공각이다" 또는 "거짓말이다"

 

"그 때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등 
무서운 경고를 받고도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그 중 소수의 무리만이 급히 가산을 정리하고 
정든 히로시마를 눈물과 함께 작별하고 가족과 함께 50리 밖으로 도피했다.

 

그 후 경고대로 그 날이 다가왔다.

1945년 8월 6일 아침
시민들은 과연 오늘 하루동안 어떠한 일이 생길까 하는 의문을 품고 
초조와 긴장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었다.

10시 15분이 되자 서쪽 하늘에서 소리없이 빠르게 다가오는 비행기가 있었다.
온 시민들은 엄습해오는 두려움으로 자포자기와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고
 이곳 저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울부짖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이미 막혔으며, 피할 기회도 끝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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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 폭격기 B29가 투하한 원자 폭탄 ‘리틀 보이’는
 상공 약 600미터 높이에서 작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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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의 투하로

 

시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20만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시내의 집들은 차례로 붕괴되어 내려앉아 버렸고 이 집들은 곧 불이 붙었다. 
 
몇몇 사람들은 집안의 사랍들을 구하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내의 전차는 핵폭발로 인한 폭풍으로 인해 넘어지고 
시내 곳곳에는 불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거나 이미 죽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강 속으로 뛰어 들었다. 

핵폭발 후 먼지와 핵 분열 생성물이 하늘로 올라갔고

 

낙진으로 인한 두 번째 방사선 피폭이 시민들에게 내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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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응급처치와 사망자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하루가 지난 뒤 도시에 들어간 사람들은 곳곳에 불에 탄 시체를 볼 수 있었고, 
어떤 시체는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불길을 막다 죽어간 어머니도 보였다.
 

핵 폭발 후 2주가 지난 후 핵 폭발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었던 사람 중 
0.8 마일 내 사람들이 방사선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반수가 나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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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 방사능에 의해 탈모를 겪은 어린이.

같은 시간 적색반점 "홍반"이 희생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피는 더 이상 응고가 되지 않았다.
 
이 것은 죽음의 반점이라 불렸고, 매일 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30여년이 경과했을때

 

약 250,000명이 방사능으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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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큰 건물 안에 있었기 때문에 원폭의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함께 있던 친구가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섰습니다.
 
일본명 카네모토라고 하는 사람이였습니다. 4일간이나 카네모토씨를 찾아다녔습니다. 
어느날 불에 탄 곳을 걷고 있었는데 큰소리로 뭔가를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 아니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나흘째면 원폭을 맞은 사람들이 간신히 냉정을 찾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는 상태입니다. 
신음 소리, 죽음에 대한 고통의 소리도 잘 들렸습니다. 
그런 소리에 섞여 카네모토씨의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나는 학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카네모토씨의 눈알은 밖으로 튀어 나와 있었습니다.
 

카네모토씨에게 내가 마중 나왔다고 하니

 

머리를 들어 튀어나온 눈에서부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듯한 눈물이였어요.

"아이고! 물!"

이라고 그가 말해서 물을 가져가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피폭을 당하게 되면 극심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와~ 그 순간은..어쨌든..인간의 원폭사 라는 것, 
보통 죽음과는 달리, 그 순간엔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이미.... 뇌를 모두 죽여 버린 것이니까 정신력이라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불탄 들판에서 들렸었던..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없었으면, 만날 수 없었지요. 
지금 숨이 멎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라고 말하는 카네모토씨의 신념이 없었으면 만날 수 없었지요. 
그 신념이 저희들과 하나가 되어 이렇게 필사적으로 마음이 맞은 것이였습니다. 
정말 보통 때에는 표현하기 힘든.... 그러한 순간들이더군요. 

그 얼굴이라는 것은... 실제 지금 생각해 보면요.....

 

이미 머리카락은 모두 불타 버리고 없었고...
몸전체는 화상투성이였고 이미 구더기가 끓고 있기도 하고, 
눈은 새빨개져서 반정도 나와 있기도 하고........... 
정말로 지금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너무...네...... 

그리고 그를 학교 교정에 옮겨 태웠습니다. 
운동장은 그 무렵, 전부가 화장터였어요. 
나무를 가져가 늘어놓아 불을 붙였습니다. 
불길이 일고 있습니다. 소리를 내면서, 그 소리가 보통 소리로 들리지 않아요 
불길의 소리가 다른 목소리로 들립니다. 

<나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온 것은 누군가!> 
<나를 죽인 놈은 누군가!>

불길이 사라지고
뼈는 제가 어찌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돌아가려고 발을 내딛으려하니 그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어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너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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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쯤이었지. 천지를 뒤흔드는 꽝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만 
짙은 화약냄새를 동반한 회색빛 태풍이 공장을 덮쳤어.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내가 20여m 공장 밖으로 날아가 내동댕이 쳐있었어. 
바람이 얼마나 세던지 공장 건물은 물론 거대한 쇳덩이도 날려 버렸어.

 

태풍의 수 십배는 될거야. 
당시 히로시마 인구가 100만 명이라고 들었는데

 

원폭으로 60만 명이 사상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어. 참 끔찍했지."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 가보니 병원마다 온통 원폭 피해자들이 넘쳐났어. 
모두 얼굴과 목, 손목 부위만 새카맣게 탄 화상환자들이

 

20명씩 조를 이뤄 치료받고 있는 장면을 봤어. 
한 조에 덜 다친 사람 한 명씩은 이들에게 음식도 갖다주고 도와주고 있더군."

엄청난 폭발음과 진동, 폭풍을 느꼈습니다.

그저 커다란 폭탄 하나가 근처에 떨어졌다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B선생 2대가 도시 상공을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 당시 일본인들은 B52 폭격기를 B선생이라 불렀다)

 

거대한 불덩이가 나타난 몇 분 후 엄청난 폭풍이 밀어닥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 중앙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피부는 녹아내려 팔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습니다.

 

그것은 생지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뜨거운 나머지 깊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강물은 불타는 나무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불타는 강에 뛰어든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우리는 전혀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 시시도 ( 폭발 당시 군 본부 근무)

 
 
 

 
히로시마 인구의 약 1/3이 원자폭탄 투하로 1주일 이내에 사망했다.
 그 이후로도 방사성 낙진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2000명에서 6500명사이의 어린이들이 원폭 투하로 고아가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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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폭발지점 800미터 근처에 있었어요..
B 선생 소리를 들은 후였습니다.
저는 그 폭탄이 왜 공중에 떠도는지 궁금했어요.
경계 싸이렌 조차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엄청나게 강한 빛을 봤고, 저절로 얼굴을 감쌌습니다.
곧 얼굴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폭탄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이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곧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난 후 보니 온통 어두웠고 전 무너진 벽돌더미에 깔렸습니다.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살려줘요! 물 좀 줘요!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습니다.
 
구조되었을 때, 저의 머리는 모조리 다 타고 얼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저는 왜 내 티셔츠가 모두 타서 내 팔에 걸려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티셔츠가 아니라 저의 피부껍질이었습니다.
 
완전히 지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물을 찾았고,
그 물을 마신 후 즉사 했습니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갈 곳이 전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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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된 팔의 피부가 벗겨지고 있는 모습.
이 팔은 회복기능을 상실해, 더이상 원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

 
폭심에서 5,0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사람은 
오렌지색 섬광과 함께 수 많은 유리 조각이

 

사람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건물이 붕괴되는 것과 사람들이 쓰러지고 불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10,000rad의 방사선이 뚫고 지나가는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이 부근에 있던 사람중 대부분이 삼일에서 사일 안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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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투하와 함께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8월 9일 
전쟁의 괴로움을 빨리 끝내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사용했다”고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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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
트루먼이 8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북한지역을 공격하자 
한국마저 소련에 넘어갈 걸 염려해 빠른 종전을 택했고

 

이로 인해 원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다.
또한 6·25 전쟁 발발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결정하고 적극 지원한 인물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최종 확인 버전: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 맨'의 버섯구름을 대기권에서 찍은 사진.

Contents

1 개요
2 투하 이전
2.1 투하의 동기
2.2 에놀라 게이
2.2.1 가로챈 이름
2.3 위험한 명령불복종
2.4 원자폭탄
3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3.1 죽음의 날
3.2 일본의 반응
4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4.1 여기가 아니다
4.2 일본의 두 번째 반응
5 일본 외의 반응
6 전쟁이 끝난 후
6.1 반성 및 피해주의
6.2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
7 논란
7.1 반대
7.2 찬성
8 여담
9 관련 항목

1 개요

広島·長崎 原爆 投下

인류가 거주하는 도시를 대상으로 역사상 단 두 번 이루어진 핵무기 투하 사건.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의 쐐기를 박았다고 평가되는 사건이다.

당시 일제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 공작을 펴고 있었는데, 특히 조선, 중국, 만주, 사할린 전부 포기하고 당장 항복하자고노에 후미마로 등의 강경파는 이미 1944년부터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처음부터 홋카이도 등을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할린이나 만주 정도로 항복을 중개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미국을 위시로 하는 국제연합군은 정치적 상징성으로든 군사적 실리성으로든 일본 본토를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화평 공작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한편 7월 말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국체 보존 (즉, 천황제 유지)가 불투명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본은 여전히 소련의 중재를 통해 조약을 체결한다는 망상에 가까운 꿈을 버리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발표를 해버렸다. 물론 '거부한다' 즉 항복을 안하겠다는 뜻이 아니긴 했지만, 공개적으로 '묵살' 즉 'ignore' 하겠다고 발표되면서 소련의 일본 침공 이전에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원자폭탄 투하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2 투하 이전

2.1 투하의 동기

원래 미국올림픽 작전이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쉽게 생각하던 미국은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처절하게 저항하던 일본군을 맞닥뜨린 후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우선 소련군의 남하도 남하지만 상륙시 너무 많은 피해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핵 두 발로 일본을 항복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 올림픽 작전이 핵탄두 20여 발과 그에 상응하는 독가스까지 사용되는 작전이라 너무나 잔혹하기는 하지만, 거듭된 항복 권유를 묵살하고 반자이 어택을 일삼는 일본군의 모습을 치가 떨리게 봐온 미군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결정에는 카미카제도 크게 작용했는데, 이를 본 미군은 "도대체 일본인은 어떻게 된 놈들인가?"라는 식의 오리엔탈리즘 연구가 있었고,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었다. 그리고 핵무기의 경우 이미 대전 전부터 이론적으로 가능했고 전쟁 내내 개발한 신형무기를 사용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실용화되기 전인 1945년 5월에 이미 나치가 항복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의 여론은 한마디로 눈이 뒤집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독일이 항복하고 세계적으로 종전 분위기가 강해진 상태에서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국내에선 일본 본토 상륙으로 큰 희생을 치르느니 기뢰 매설과 해상봉쇄로 그냥 다 굶겨 죽여 버리자는 여론도 해군을 중심으로 매우 강하게 대두될 지경이었다. 심지어 마침 추수철이 다가오고 있던 시점에 일본의 모든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뿌려버리는 걸 당연시 할 정도였으니 뭐...

더구나 선전포고도 없이 이뤄졌던[1][2] 진주만 공습 때문에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매우 심한 것이어서, 히로시마에 대한 핵폭격 당시에도 더 치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투하 전에 사이렌을 울려서 시민들이 하늘을 보게 하고서 터뜨려서 폭발 섬광으로 인한 실명을 최대한 유도, 인명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 보겠다고 하거나, 핵폭격으로 도시 기능이 마비된 곳에 한 번 더 소이탄 폭격을 감행해서 소방시설이 마비된 상태에서 화재를 일으키면 도시가 완전 전소되리라는 것을 노려서 도시의 흔적도 완전히 사라지게 하자는 과격한 의견이 올라왔다. 당시만 해도 원자폭탄이 히로시마급 도시를 그대로 완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실제로 히로시마는 핵폭격으로 시 전체의 54% 영역만이 직접 피해를 입었다. 물론 폭풍 및 화재로 인한 간접피해까지 계산하면 훨씬 넓은 영역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실전에서의 위력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위의 과격한 주장이 억제된 건 그랬다가 원자폭탄 피해가 다른 피해에 묻히면 원자폭탄의 정치적 상징성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게 비인도적이라거나 무의미한 공격이라든가라서가 아니었다!

사실 원자폭탄의 위력, 특히 방사능으로 인한 2차 위력은 당시에도 몰랐다. 방사능으로 인한 백혈병이나 암발생, 혹은 열선도 당시에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었다. 전쟁 중 및 전후 기록 필름에서 원폭실험을 한 뒤 군인들이 원폭이 터진 자리에 진입해 자료를 모으고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전후 원폭 지역을 시찰했던 윌프레드 버쳇이 후일 방사능 후유증이 분명한 병에 걸렸음에도 미 군부는 "우연의 일치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그래도 원자폭탄을 실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쓰는 건 너무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래서 일본 정부에 사전 경고와 더불어 성층권 정도의 고공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려서 위력을 시연해 보이거나 인구밀도가 희박한 마을에 투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의 "성층권에서 거대한 핵불꽃이 터지고 실제 피해는 미미하다면 과연 일본 지도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라는 의견처럼 효과 자체가 미지수여서 묻혀 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고공 폭파시켜서 그 위력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것은 애초에 제정신박힌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거지, 눈 까뒤집고 반자이 돌격이나 해댈 정도로 나라 전체가 미쳐돌아가는 수준이면 이미 공포심이고 뭐고 생길 틈새조차 남지 않는다. 거기에 당시 그 동네의 사고방식으로 번쩍하고 끝나면 십중팔구는 덴노님의 은총으로 절묘하게 바꿔버리면서 더더욱 자폭 공격에 열을 올렸을 거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든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었던 상황이었다.

그 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곳을 미리 예고해서 민간인이 대피하게 함으로써 실제 피해는 줄이면서 심리적 효과는 더 높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 혹시 원자폭탄이 불발되는 경우 차후 미국이 하는 모든 제안이 일본 대본영에게 허세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일본인들이 연합군 포로를 히로시마에 끌어다놓고 인간 방패로 삼으면 어쩔 거냐는 의견도 나와서 기각되었다. 원래 미 육군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독일을 폭격하던 당시 목표가 된 도시에 아군 포로가 있음이 확인됐더라도 거리낌없이 폭격했는데, 아군 포로의 희생을 막으려고 폭격을 중단하면 앞서 말했듯이 중요 지점마다 연합국 포로를 묶어놓아서 인간 방패로 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일단 폭격을 당하는 연합국 포로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고, 유명한 소설가인 커트 보네거트는 악명높은 드레스덴에서 아군의 폭격을 당한 경험으로 <제5도살장>이라는 소설을 썼다. 게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히로시마에는 미군 포로가 20여 명 정도 있었다. 전후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그 중 시체가 남아 있는 사람은 단 3명... 나머지는 말 그대로 원자폭탄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여명의 눈동자 원작에서는 이런 것을 감안해서 OSS에서 윤여옥을 보내서 포로수용소 위치를 밝히려는 작전을 한다.

2.2 에놀라 게이


에놀라 게이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로서 유명하다. 미 육군항공단 509 혼성그룹 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기체번호 44-86292. 기체의 심볼은 노즈아트(Nose Art)로 새겨진 기수의 ENOLA GAY와 수직 미익(꼬리날개)의 R. 맨하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 Mk-1 코드네임 Little Boy의 모기(母機).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 사실 덕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 작전을 위해 폭격기 방어용 회전기관총탑도 제거했다고 한다. 2013년 현재는 복원되어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 영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서도 잠깐 스쳐 지나간다. 에놀라 게이가 나왔을 때 영화관에서 환호성을 질렀다는 사람도 있다.

참고로 나카사키에 '팻 맨'을 날린 비행기의 이름은 '복스카(Bockscar)'. 해당 B-29 기체의 기장인 프레드릭 복의 이름을 따왔다.

2.2.1 가로챈 이름

이름의 유래는 본기의 기장 폴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성함으로, 어린 시절 비행사가 되려 했던 그의 꿈을 북돋아줬던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따 'ENOLA GAY'로 명명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폴 티베츠는 부대장이었고 원래 이 기체 담당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무 직전에 지휘관으로서 꼬장 독단을 부려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를 빼버리고 히로시마 작전만 자신이 맡는 것으로 바꾸었다.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로버트 루이스는 불쾌해했지만 계급이 깡패니까 참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아침에 루이스는 계류장에서 자신의 애기에 커다랗게 '에놀라 게이'라는 페인팅이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티베츠 스스로도 뒤가 켕겼던지 야음을 틈타 하룻밤 사이에 칠해놓은 것이었다. 이 일만큼은 루이스도 격분하여 티베츠에게 달려가 극력 항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억울하면 군대 일찍 오든가! 티베츠가 이런 무리한 일을 저지른 이유는 물론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기체로써 자신과 어머니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폴 티베츠 본인은 에놀라 게이의 다른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2005년 원폭 60주년을 맞아 '원폭은 필요했고 우리는 죄책감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다음 해 티베츠 자신은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방어기제로 그런 생각을 가진 것 아닐까 싶을 수 있지만, 티베츠는 전역 후에 원폭 투하를 흉내내 버섯구름을 재현하는 에어쇼를 벌인 적도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과까지 했다.

2.3 위험한 명령불복종

원래 작전상으로 리틀 보이는 기폭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기체에 싣고 이륙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일본으로 가는 도중 추락하게 된다면 임계사고를 막기 위해 폭탄을 분해해 뿔뿔이 흩어놓도록 지침이 내려져 있었지만, 지시한 사람도 그게 가능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리틀 보이 자체도 매우 무거웠던 데다가[3], 주둔지의 지질 때문에 활주로 노면 상태도 엉망이었기 때문에 이륙이 지극히 불안정했다. 자칫 이륙하다 추락하면 망했어요. 게다가 원자폭탄이 유폭할 경우 해당 비행장과 부대원 전원, 좀 넓게 잡으면 섬 전체가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폭탄 담당 승무원 윌리엄 파슨스는 명령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작전 며칠 전부터 그는… 무단으로 원자폭탄 분해·조립을 반복했다. 까짓거 조립은 분해의 역순 이륙한 다음에 공중에서 기폭 가능 상태로 조립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공중에서 조립하겠다는 것도 지상에서 연습하겠다는 것도 위험천만한 명령불복종이었지만, 대놓고 연습에 매진하는 상황에도 문제삼는 사람은 기지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무기에 관한 파슨스의 뛰어난 재능은 인정을 받고 있었기에 따, 딱히 이륙하다 터질까 봐 눈감아주는 건 아니니까! 원래의 폭탄담당 승무원을 대신해 히로시마 임무에 발탁된 것이기도 했다.

결과는 아는 대로. 원폭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이 용자짓을 해 결국 폭탄이 제대로 터지게 한 주역인 셈. 한반도 독립에 도움을 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2.4 원자폭탄

B-29에 의해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은 '리틀 보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은 '팻 맨'이라는 이명이 붙어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우라늄 235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후자의 경우는 플루토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그에 따라 달라졌다. 리틀 보이는 두 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팻 맨은 텅빈 공간 바깥에 플루토늄을 배치한 후 기폭과 동시에 이 조각들이 안쪽으로 날아가서 공 모양으로 합쳐지고, 그것이 폭발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원자폭탄의 기밀을 감춰야 하기 때문에, 리틀 보이는 루즈벨트[4], 팻 맨은 처칠로 불렸다.

3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3.1 죽음의 날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까지 히로시마는 상당한 규모를 가진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이때까지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었다.[5] 이런 도시가 몇 개 있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 코쿠라, 니이가타, 쿄토였다. 이 중 쿄토를 제외하고는 바로 원자폭탄의 표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히로시마는 왜 그럴까?'를 궁금해 하던 어느 날. 아침에 정찰기 3대가 히로시마 상공을 훑어보았고, 히로시마에 사는 사람들은 폭격인 줄 알고 급히 대피했다. 물론 피해는 없었고 사람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몇 시간 후 B-29 폭격기 하나가 단독으로 날아왔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늘 오던 기상 정찰용 비행기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6] 그래서 대피를 안 했는데...



죽음이 내려왔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리틀 보이는 바람으로 인해 원래 조준점이었던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미터 정도 빗나가 시마 외과병원의 60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의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직접 쳐다본 사람들 중에서는 눈이 멀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수억 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뜨거운 화구가 공중에 생기고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약 3000-4000도가 넘었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삭제되었다. 계단에 앉아 있던 사람이 증발하기 직전에 열선과 방사선으로 생긴 검은 흔적(원폭 그림자)[7]은 오늘날 원폭 박물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뒤이어 열폭풍과 함께 잇따라 충격파로 인하여 최대 초속 340m[8]에 달하는 엄청난 후폭풍이 주변 1.5km 내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거리 내에 있던 건물들은 아주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 전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 한 발의 폭탄은 히로시마를 완벽에 가깝게 파괴하였다. 하필이면 투하시간이 사람들의 출근시간이었기에 피해가 더 컸다.일례로 폭심지에서 불과 몇 백미터 떨어진 은행에선 일찍 출근한 말단 여직원 두 명을 제외하고[9] 출근 중이었던 다른 직원들은 모두 절명했다. 당시 폭심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고 알려진 생존자는 노무라 에이조라는 남성인데, 폭심지에서 불과 170m밖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콘크리트 빌딩의 지하에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히로시마 시 전체는 방사선과 열로 가득해졌고 잿빛 대기로 태양마저 가려져 사방이 밤처럼 어두웠다 사방팔방이 불지옥으로 변한 상태였다. 불교의 지옥도단테의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의 생지옥이었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으며 방황하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는 사람이 다리 밑으로 떨어지자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나는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을 전하는 목격담은 셀 수 없다.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대기는 지극히 건조해져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로 되었다. 사방에 널려진 죽지 않은 부상자들로부터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이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 희생자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무려 90% 이상이나 죽거나 다쳤다.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은 고군분투했으나 피해상황은 초월적인 어떤 것이었다. 끝없이 넘쳐나는 중환자들로 트리아제 같은 분류는 무의미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환자의 화상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10]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만에 죽어갔다.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뼈저린 무력감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도시가 도시였던 만큼 군인들도 상당히 많이 죽었다. 7-8만명의 희생자 중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2만명이나 됬을 정도였으니.. 2총군 대부분이 죽었다. 이중 상당수가 원폭에서 80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 성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열명 이상의 미군 포로들도 대부분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몇몇 포로는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생존자들에 의해서 맞아죽었다는 증언도 있고, 치료를 거부받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3.2 일본의 반응

"이건 원자폭탄이 아니다. 큰 재래식 폭탄이다!"

유례가 없는 참혹한 공격이 가해진 이후, 일본 군부가 보인 반응은 이것이었다. 일본의 물리학자가 히로시마를 본 순간 '원자폭탄'부터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히로시마가 괴멸하면서 히로시마 안의 보고체계는 아예 증발해버렸고, 피해보고는 외곽 주변의 관찰부터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피해보고는 원거리에서의 열풍·열복사 등에 관한 것으로,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는 막을 수 있었다"라든가 하는, 아직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혹독했던 미군의 대공습을 뛰어넘는 엄청난 피해 실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모아도 해당 폭탄이 재래식 폭탄은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맛이 간 일본군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상층부가 현실도피 &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이 항복의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소련을 통한 대미 강화협상은 진행중이고 국체의 온존 및 약간은 온건한 방식으로의 강화를 추진했다. 물론 대일 참전을 생각하던 소련으로서는 그걸 들어줄 리가 없었다. 히로시마 이후 군부와 정부가 모두 항복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싹싹 빌어보자는 화평파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최소한도로 단기간에 끝마쳐야 하며,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강경파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되었고, 결국 미국은 일정에 따라 한 발을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만 이 화평파와 강경파의 갈등 자체가 이미 늦었던 것이 화평파가 입장을 확고히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는데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항복을 결정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하고 8월 9일-즉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에서야 열렸다. 즉 이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건 일본은 히로시마에 대한 대응 자체가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더구나 8월 9일 회의중에 2차 핵 투하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지도부는 미국이 더 이상 핵이 없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4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4.1 여기가 아니다



팻 맨을 싣고 이륙한 B-29인 '복스카(Bockscar)'(기체번호 44-27297)는 에놀라 게이와 동일한 509 혼성그룹 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추가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위해 후쿠오카현 코쿠라(小倉, 현 키타큐슈시 코쿠라키타 구, 코쿠라미나미 구)로 날아갔지만, 구름으로 인한 시계 불량으로 폭격을 할 수가 없었다.[11]
제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며, 재고량도 없었던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므로 가급적이면 육안조준으로 정확하고 가장 피해가 크도록 폭격을 할 예정이었기에 폭격기는 기수를 돌렸지만, 나가사키 역시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연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고, 이대로라면 폭탄을 버리거나 레이더 조준으로 폭탄을 투하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30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구름의 틈으로 나가사키 시가지가 보일 정도로 큰 맑은 구역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그리고 나가사키에도 버섯구름이 피어 올랐다. 4만에서 7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그날 사망했다.

플로토늄 폭탄 팻 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16kt짜리 리틀 보이보다도 컸는데, 피해는 히로시마에 비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완전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에 비해 산지투성이라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열선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막혀서 인명 피해가 히로시마의 4분의 1 정도로 더 낮았다. 게다가 조준이 어려웠기에 원래 노렸던 투하지점에서 4km 이상 빗나간 것도 겹쳐서 위력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도 일본 군부는 원폭을 탑재한 복스카가 큐슈를 향해 접근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같은 V600번대 콜 사인을 사용하는 B-29가 출격했으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 판단하여 보고했지만, 당시 최상층부가 소련의 참전으로 인한 긴급회의 중이어서 무시되었다(…). 덕분에 이번에도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폭격 이후,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인한 성과 파악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한 포츠담 선언 이행을 다시 한번 촉구하기 위해서 당분간 원폭 투하를 중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폭격하고 싶어도 폭탄이 없었다. 당시 플루토늄 폭탄용 폭축렌즈는 폭약설계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새 폭탄을 위한 플루토늄 추출은 진행 중이었으며, 플루토늄 폭탄의 필수품인 핵기폭기(베릴륨과 폴로늄)도 예비가 없었다. 우라늄 폭탄은 아예 3~4개월 이상 추가 농축작업을 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는데 생산시설에 기계적 문제가 생겨 생산중지 상태였다. 이 때문에 세 번째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그나마도 빨라야 8월 20일에야 준비가 가능했다. 참고로 첫 핵폭격 후 10개월 뒤까지도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은 7발에 머물렀으며, 플루토늄은 9발분 있었다. 22개월 뒤 시점에도 가용 폭탄은 13발에 불과했다.

4.2 일본의 두 번째 반응

소식을 접한 소련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잽싸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본 일본 군부는 이제서야 무조건 항복을 결정한다. 일단 학자들에 따라서 원폭과 소련 참전 중 과연 어느 것이 항복에 더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일단 다이쇼 이래로 제국의 절대 방위선인 북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상황에 내지에서도 그러한 공격을 당하면 일단 국체보전이라도 한 상태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

항복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다. 사람들은 덴노를 신적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깔끔하지 않았고, 또 내용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매우 힘든 일본어 문어[12] 형식으로 되어 있어, 처음엔 이 방송을 하였을 때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그후 방송요원이 일상언어로 해석하여 후에 방송하여 드디어 항복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결정된 항복조차도 청년 장교들의 반발로 쿠데타가 발생해, 사단장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천황이 거주하는 궁성이 반란군에 의해 점령, 쑥대밭이 되는 등 천황이고 나발이고 화평파를 싸그리 잡아 죽이려던 사건이 발생했다.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자결하거나 카미카제 공격에 참가하는 식으로 반항했고, 그 와중에서 항복선언이 발표되게 된다. 오죽하면 항복을 결정한 날이 일본의 가장 길었던 날이겠는가. 당시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생활을 하던 작가 오오카 쇼헤이는 소련의 관동군 공격과 스웨덴을 통한 일본의 항복 요구 타전을 발표한 8월 10일을 포로들에게 사실상의 전쟁이 끝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10일부터 15일까지 죽은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죽은 것이고 왜 요타전후 대국민 발표를 늦게 했는지 한탄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전쟁은 끝났다.

5 일본 외의 반응

숙연하거나 충격에 사로잡힌 반응이 예상되지만, 핵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던 당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다는 사실에 좋아했다.

일본에서 나온 작품에는 핵폭탄 투하 소식에 미군 병사들이 죄책감을 갖고 숙연해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그러나 정작 당시의 미군 병사들은 핵폭탄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핵으로 전쟁을 끝내 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키스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왜냐고? 반자이 어택이나 카미카제 등 일제의 각종 똘기넘치는 짓에 죽어나가던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 준 걸 반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미국 본토에서도 딱히 동정심이나 죄책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다. 일단 당시 핵의 정확한 위력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원폭 피해자 등을 담은 끔찍한 사진들은 검열되었다. 또 프로파간다와 국민적인 인식의 영향이 큰데, 일단 진주만 공습으로 본토가 사전 통보 없이 공격당한 분노가 큰 데다가, 문화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반자이 어택 항목에서처럼 인명 따윈 장식으로 여기는 일본군의 미친 짓거리들 역시도 미국인들에겐 전혀 이해되지 못하고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누가 이해하겠어 승리의 영광으로 우쭐거리던 유럽 전선 폭격과 다른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이는 선전 포스터에서 극명하게 보여지는데, 대독 선전 포스터에서는 나치 독일을 뱀같은 동물이나 사물로 애둘러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일 선전 포스터의 경우에는 말그대로 악의적으로 눈 째지고 광대뼈 튀어나오고 뻐드렁니 나온 일본인(엄밀히 말하자면 도조 히데키의 캐리커쳐)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는데다 가차없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멸시하는 포스터가 그려졌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원폭투하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극으로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건 냉전으로 핵전쟁에 대한 위협이 커지기 시작한 1950년대 말 부터였다.

티베츠를 포함해 조종사 상당수가 딱히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선택한 정당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 2차대전 종전 50주기를 맞이하여 당시 MBC에서 에놀라 게이를 몰던 조종사(티베츠는 아니었다.) 중 하나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그는 "나는 전쟁에서 죽을 뻔한 수백만을 구했습니다. 조금도 원폭 투하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원폭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더했을 겁니다. 그건 그래"라며 일절 죄책감 따윈 보이지 않았다.

  • 기장 폴 티베츠 : 1975년 인터뷰에서 "나는 맡은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다. 매일 밤 잠을 잘 잔다"고 했으며, 2005년에는 "만약 같은 상황이 또다시 내게 주어진다면 똑같이 할 것이다"고 발언했다. 또, 2005년 BBC다큐멘터리에서는 "나는 맡은 바 임무를 다 했으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나 다행스럽다"고 밝힌 바 있다. 2007년 사망하기 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 폭격수 토마스 W. 페러비 : 폴 티베츠처럼 폭탄을 투하한 일에 대해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해야 될 일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 레이더 담당 장교 제이콥 베서 : "내가 한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후회 한 적이 없다. 나는 진주만과 일본이 한 잔학행위들을 기억한다."고 밝힌 바 있다.#
  •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 똑같은 상황이 다시 주어질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네, 저는 다시 할겁니다. 우리는 5년간 전쟁했고, 항복하지도 패배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적과 싸웠습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비키니섬 핵실험에도 참가한 바 있다.#
  • 부조종사 로버트 A. 루이스 : 폭탄 투하시 "오 주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고 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도 죽을때까지 그의 임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저 발언은 폭탄의 엄청난 위력에 놀란 것으로는 볼 수 있을지라도 후회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유일하게 죄책감을 보였다고 알려진 것은 기상정찰 임무를 맡고 에놀라 게이보다 한 시간 먼저 비행에 나섰던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다. 그는 한 두번 자살시도한 적도 있었고, 히로시마에 사과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중에는 위조죄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겸 작가 William Bradford Huie는 그의 사죄의 진위성의 의심스럽다고 밝혔는데, 이유로 전후 이덜리 소령이 몇 년간 핵폭탄 투하 훈련을 계속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반핵주의자들이 날조하고, 이덜리 소령 자신은 명성을 얻거나 주의를 끌고 싶어서 그랬다고 견해를 밝힌바 있다. 참고로 기장인 폴 티베츠는 그에 대해 "폭탄이 떨어질 때는 거기 있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참고로 SF소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의 저자인 SF작가 월터 M. 밀러 주니어는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원 폭격에 폭격기 승무원으로 참전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결국 1996년에 자살했다.[13] 그러나 알아둘 점은 히로시마와 달리, 베네딕트 수도원 폭격을 비롯한 유럽 폭격 당시 연합군 조종사들은 죄책감을 성토하는 게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연합군 측의 미국인 군인들에게 있어서 가톨릭 등 미국 문화와 정서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공격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유럽 전선의 경우 미국 본토가 독일에게 공격받지 않아서 병사들이 참전에 의문감을 가지면서도 명령이란 이유로 나갔기에, 유럽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 유적과 유산을 재로 만든 걸 비난하거나 죄책감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시에 정보 얻는 게 어려운 식민지 한국인들은 당시의 1차 사료나 해방 직후의 반응을 보면 무언가 무서운 폭탄이 내지(일본 본토)에 떨어졌다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기뻐했다. 원폭투하로 인한 결과물이 바로 8.15광복이니까. 특히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해왔었으니만큼 사실상 조국광복이 온다는 신호탄이기도 하였고 일각에서는 일본의 못된 짓거리에 하늘이 대노하여 천벌(天罰)을 받은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친일파 제외 다만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던 일부 재외 독립운동가들은 원폭 투하에 따른, 작전 계획보다 빨랐던 항복선언에 대해 통탄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그 대목이 드러나 있다. 광복 이후 한국의 지식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부국강병뿐만 아니라 국가의 독립에 있어서도 과학기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 과학기술에 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공밀레의 길로...

조병옥의 경우는 일제의 탄압으로 시골에 요양을 살았던 1942년에 이미 미국에서 원폭을 개발해서 떨어뜨릴 거라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몰래 알려주었다고 회고록에 적을 정도였다. 다만 정확하게 원자폭탄이라고 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당장 원폭 개발은 당시 미국에서도 초극비 프로젝트이다. 심지어 해리 S. 트루먼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취임 시까지 원폭 개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을 정확히 아는 예외가 있다면 핵 개발에 참여해서 그 위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일부 과학자들과 투하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한국인, 중국인, 전쟁포로, 중립국 출신의 선교사들일 것이다. 일단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독일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독일이 핵을 보유할 때 뒤쳐지지 않으려고[14] 참여한 거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 무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선 축복의 불꽃이라고 대단히 기뻐했다. 4년 동안 일본에게 지배당하면서 중국계들이 학살당하던 지옥을 겪었기 때문.

중국물어보면 잔소리다. 철천지 원수였던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드디어 힘을 잃고 사라졌으니.

1994년 개최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원폭에서 완전히 회생한 히로시마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상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위원회측이 정신이 나갔는지 타국(아시아) 선수들과 스탭들을 공식일정의 관광이랍시고 원폭 희생자 위령 기념물에 데려가는 과정에서 마찰을 겪었다.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어쩌구 하는 가이드의 말에 "전쟁 일으킨 게 누군데!!!"라면서 선수와 스탭들이 발끈해서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졌었다고.

2005년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 추모관 야드 바셈 박물관의 개막식에 원폭을 운운하며 피해자 그룹에 참가하려다가 박물관 측에서 나치라는 비난을 들었다...라는 이야기가 한국 웹에 퍼져있는데, 사실 이스라엘 현지신문 Ynetnews에서의 외교부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원수가 초대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주이스라엘 일본대사관의 직원들은 초청되었다.), '원폭을 홀로코스트에 비견하려 할까 봐' 초대되지 않았다는 것은 루머이며 단지 일본은 홀로코스트 해방에 기여한 국가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 딱히 관심이 있는 나라도 아니기 때문에 초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피해자 드립'이나 '나치 비난' 등의 사실은 한국발 루머.

6 전쟁이 끝난 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로, 리틀 보이는 모든 핵무기의 위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새로 나온 핵폭탄의 위력을 언급할 때 '히로시마의 몇 배다'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놈은 15~20 킬로톤(kt). TNT 15,000톤~20,000톤을 동시에 터트려야지 발생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다. 자세한 것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참조할 것.

6.1 반성 및 피해주의

원자 폭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가 산출된 실질적인 사건인 만큼, 원폭에 대한 부작용과 그 공포에 대해 실질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는 만화 맨발의 겐(전 10권)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뒤에서 훈도시를 늘어뜨린 줄 알고 자세히 봤더니 원폭으로 인한 고열에 등가죽의 살이 녹아 늘어난 것이었고, 팔의 살도 늘어진게 땅에 끌리기에 하박을 들고 걷는다거나, 입고 있는 옷이 타면서 옷의 무늬가 고열로 살가죽에 아예 녹아 인쇄되어 버린다거나...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사. 폭풍으로 깨진 유리창이 온 몸에 박히고 그 살가죽에 멍이 들어 온몸이 시퍼렇게 되었다거나...일반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책이기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장.

일본인들에게는 이런 핵무기의 공포가 가슴 깊이 각인되어 반전의 상징이 되었으나, 일부 우익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 아닌, 자신들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즉 일본이 전쟁과 서구 패권주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일본에게 침략당한 아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일본인들이 일본제국의 범죄와 그 책임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고, 당시 일본 국민의 여론도 태평양전쟁에 우호적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논리는 자신들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폭 투하가 반전(反戰)의 메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같다. 이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러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서 이러한 역사인식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그것이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전쟁에 대한 미화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는 순수하지만, 그러한 원동력이 역사적 반성의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히로시마는 일본 내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히로시마의 경우 일본 내에서도 전쟁의 피해자란 인식이 강해서 강한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 1999년 기미가요(일본 국가) 제창과 히노마루(일본 국기) 계양에 거부하여 교사와 교장의 충돌 끝에 교장이 자살한 곳도 히로시마다.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다 보니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져 일제의 피해를 입은 외국들에 대한 반성도 어느 정도 있다.

당시가 언론통제가 심한 군국주의 치하였다고는 하나, 민중의 여론 역시 전쟁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설령 언론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본 군부만이 나쁘고 일반 민중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식의 이원론을 적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추축국의 국민 역시도 잠정적인 전범이란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러나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희생된 것 역시 사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일본인이 전부 극우에다가 주전파였던 것도 아니고 개중에는 반전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한 양심적인 일본인도 있다. 그리고 원폭의 희생자 중에는 참정권도 없는 아이들도 있었고. 애초에 이 무고한 사람들 모두 일본이 미국의 거듭된 항복하라는 요구에도 반자이 어택으로 미친 짓을 일삼지만 않았더라도 죽어나지 않았을것이다. 당장 이 폭탄이 투하되었을때 세계인들의 반응이 'OLLEH!! 그간의 악행에 대한 정당한 대가, 신의 심판을 받은거다!' 정도였던 걸 생각해보면... 나라를 잘못 만나서...

히로시마에서는 원폭투하를 이유로 국가지원금을 받아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이것을 '원폭산업'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전쟁을 방관한 히로히토 덴노는 '전쟁을 멈춤으로서 일본을 구했다'는 말도 안 되는 평가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해외에서는 악마의 화신이자 증오의 전범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6.2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진정한 피해자는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히로시마에서 한국인도 원폭 희생자로 많이 사망했다. 당장 대한제국의 황족인 이우 공도 이 투하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또한 일본프로야구의 전설인 장훈 선생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강한 화상을 입어 사망했다. 또한 장훈 선생은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일본프로야구 선수 중에서 유이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한국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서 있지만, 일본의 평화공원 가이드들은 이에 대해 절대로 언급하지 않으며 여행코스에서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아예 빼버렸다. 이에 대해 해당 공원에 항의하는 한국인도 있으나, 공원 측은 항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 위령비는 구석에 처박혀 있으며, 일본인 가이드들은 그 위치에 대해 일체 가르쳐주지 않는다.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역사적 증거물에 대해 언급하기 싫은 것이다.

지금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사이트에도 한국 피폭자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http://www.pcf.city.hiroshima.jp/virtual/VirtualMuseum_j/visit/est/panel/A4/4205_2.htm 물론 분량이 상당히 짧다.

물론 일본에도 제대로 된 사람은 있다. 당장 2011년 10월 3일 도요나가 게이자부로 씨가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40년간 지원해준 공로로 외교통상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2012년 9월 18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가 나가사키시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장영준 씨에게 원폭 수첩을 교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장영준 씨는 원폭투하 3일 후 부친을 찾아 나가사키시로 왔다가 폭심지 근처를 지나면서 피폭당했고, 2009년 1월에 수첩교부를 신청했지만 나가사키시가 "증인이 없다"며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안타깝게도 장영준 씨는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하고 8월 17일에 돌아가셨다.

원폭 투하에 대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의견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나는 원폭을 투하한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지지하는 부분도 있다"는 견해를 밝힌 사람도 있고,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미국은 반성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7 논란

원폭투하가 정당한 일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꽤 뜨거운 논란거리이다. 참고로 반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미국과 미군을 까는 근거 중 하나로 쓰기도 한다(...)

7.1 반대

원폭 논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미국이 원폭을 쓰지 않아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았느냐" 다. 일단 일본은 이미 1944년부터 지속적으로 화평을 시도하는 중이었고 원폭 투하 직전까지 소련과의 교섭에 국운을 걸고 있었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소련의 만주 침공이 항복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따라서 소련의 만주 침공까지 기다린다면, 일본의 교섭 여지가 붕괴되면서 무조건 항복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므로, 좀 더 침착하게 기다리면서 협상을 했다면 일본도 알아서 항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참고로 원폭 투하 전에도 모든 고위급 인사들이 찬성한건 아닌데, 이때 반대하던 고위 장성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체스터 니미츠 장군 등도 끼어있었다.

7.2 찬성

반면 만약 원폭 투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키나와에서 이루어졌던 자살과 같은 저항을 지속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따라서 몰락 작전올림픽 작전이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일본인들은 1억 총옥쇄를 향해 달려갔을 것이고, 양측에서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더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미국이 원폭투하와 전후처리를 서두른 이유 중에 하나가 소련의 대일 행동을 의식해서란 말도 있다. 일본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면 소련이 일본 열도의 일부를 점령할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4년 가까이 태평양에서 거의 혼자서 일본을 상대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8월 내내 홋카이도의 반띵 남북 분할을 요구했지만 트루먼이 무시했던 바가 있다.

8 여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상황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위키니트께는 <카운트다운 히로시마>라는 책을 추천한다.[15] 방대한 자료 조사와 중립적인 시각으로 원폭 투하 준비과정(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비극도 나온다.)부터 생존자들의 이야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같은 제목의 BBC 다큐멘터리도 추천한다.

캐나다의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락 밴드 러쉬의 대표곡 <Manhattan Project>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소재로 한 노래다. 러쉬의 드러머 닐 피어트는 이 곡을 작시하기 위해 관련서적을 10권이나 독파했다고 한다. 흠좀무.

폴란드의 작곡가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는 원폭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곡인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위한 비가(悲歌)(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를 작곡하였다. 다만 흔히 생각하는 진혼곡의 잔잔하고 슬픈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곡이다. 심약자 조심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는 1984년 이 사건을 노래한 Hiroshima(히로시마) 라는 노래를 냈다. Dirty Fingers 라는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일본 크툴루 신화 관련 소설에서는 이게 일어났을 때 크투가가 강림했다고 쓰는 경우가 간혹 있다.

9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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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확히는 선전포고가 없었던 건 아닌데...공습 후에 선전포고가 도달했다. 후전포고?
  • [2] 선전포고를 한 뒤에 공격한 것이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왜곡된 주장도 있지만...그런 주장을 믿으면 골룸하다.
  • [3] B-29의 적재 한계가 9톤인데 리틀보이의 중량은 4.5톤. 혼자서 적재중량의 반을 차지하는 무식한 물건이다.
  • [4] '리틀 보이'의 처음 이름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별명인 THIN MAN이었다. 만드는 동안 길이가 줄어서 LITTLE BOY로 바꿨다.
  • [5] 다만 맨발의 겐에 보면 비행기 3대가 총알로 집들을 쏘는 장면이 있다. 소규모 공격은 있긴 있었나 보다.
  • [6] 하지만 일본 군부는 티니안 섬에서 새로 편성된 B-29부대가 편성되어 훈련 중인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참보부 소속의 정보부대가, 미국이 7월에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후 v600번대 콜 사인을 가진 소규모의 B-29부대가 티니안 섬에 배속되었다는 정보를 감청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콜 사인만을 알 수 있었고 그 부대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띄고 있는지는 몰랐다. 원폭 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대피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 [7] 대충 해변에서 피부 그을리는 거랑 비슷한 원리
  • [8]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힌다면, 나무를 뽑아버리고 건물에 피해를 입히는 태풍의 초속이 33m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주변의 모든 것이 음속과 비슷한 속도로 개발살난다.
  • [9] 두꺼운 석조건물의 가장 안쪽에 들어와 있었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 [10] 방사선 화상은 DNA자체의 파괴를 일으켜 조직 재생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은 다른조직도 파괴하여 신체 내외에서 출혈을 일으키고(혈관세포 파괴), 구토, 설사(위장관세포 파괴)를 끊임없이 하게된다. 영양흡수가 안되 아무리 먹어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된다.
  • [11] 일본의 작가 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의 초반부에서 코쿠라가 고향인 주인공 '나'의 어머니가 이때의 일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인공 '나'는 항상 어린 마음에 "날씨가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그런 정도에 그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리고 말고 하다니,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는 짓이 참 어설프고 바보 같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근데 그게 코쿠라에 떨어졌으면 넌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다.
  • [12] 흔히 황족 언어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일본어 문어로 구성된 선언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옥음방송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 [13] 그는 전쟁 후인 1947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14] 나중에는 독일은 핵개발에 거의 관심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 [15]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2737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