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항해자들이여, 망망대해에 뛰어들면서 우렁차게 이별가를 부릅시다." 핀란드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가 1990년에 낸 장편 '기발한 자살 여행'의 한 대목이다. 핀란드인 스무 명이 노르웨이 해안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기로 한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며 서로 고민을 털어놓다 보니 삶의 위안을 얻는다. 사랑에 빠진 커플도 생기면서 여행의 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된다. 핀란드가 자살 1위 국가였던 때를 풍자한 소설이다.
▶핀란드 정부는 1986년부터 6년 동안 자살자에 대한 '심리적 부검(剖檢)'을 했다. 전문가 5만명이 자살자 주변 인물을 인터뷰해 자살 유형별로 예방책을 세웠다. 덕분에 핀란드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17명으로 떨어졌다. 일본은 2006년 자살대책기본법을 만들었다. 구청이 자살 시도자와 자살자 유가족을 전담하는 직원을 뒀다. 해마다 지역별 자살 통계를 발표해 지자체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자원봉사자 7000여명이 전화 상담에 나섰다. 자살자가 해마다 줄었고 지난해엔 재작년보다 9.4% 떨어진 2만7766명을 기록했다.
▶전북 진안군은 2011년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이 75.5명으로 전국 1위였다. 전북도청이 부랴부랴 진안군 주민을 모두 조사했다. 자살할 위험성이 높은 예순세 명을 집중 관리했다. 전북 광역정신보건센터가 매주 한 차례 넘게 전화를 걸고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가 심리 상태를 확인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불러 '웃음 치료'도 했고, 쓰다 남은 농약도 거둬들였다. 진안군 자살률은 지난해 인구 10만명당 21.8명으로 72%나 떨어져 전국 234위로 내려앉았다.
▶우리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3.5명으로 OECD 국가 중 부끄러운 선두를 달린다. 한국자살예방협회는 우울증 자살이 전체의 3분의 1에 그친다고 했다. 대부분 자살이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얘기다. 다른 나라에 비해 노후 준비를 못 한 노인 자살이 많다. 사회에 진출한 20~30대 여성 자살률도 높다. 일을 하면서 육아 부담과 시댁 갈등이 겹겹이 쌓인 탓이다. 전문가 상담을 통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자살 유형이다.
▶20년 전 한국은 교통사고 사망률이 세계 1위였다. 반드시 안전벨트를 매게 하자 생명띠 역할을 톡톡히 해 사망률을 줄였다. 이젠 자살 유혹에 안전벨트를 채워야 할 때다. 노벨상 수상 작가 르 클레지오는 "한국어 '정(情)'은 서양어로 번역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정 많은 우리 사회가 자살 방조죄를 저질러서야 되겠는가. 입력 : 2013.10.11 03:07
연두색 조끼를 입은 직원들이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상담 대상자인
안모(77) 할머니가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직원들을 반갑게 맞았다.
안 할머니는 "자네들 온다고 해서 아침부터 청소했어"라며 활짝 웃었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안 할머니는 "이제 그만 죽어야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5년 전 급성 뇌경색을 앓았는데, 후유증으로 입술 오른쪽이 굳어 발음이 새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그 바람에 동네 이웃들과 마주치거나 말하는 것도 꺼리게 되면서, 우울증 지수가 63점 만점에 44점으로 높았다. 우울증 지수는 25점만 넘어도 자살 고(高)위험군에 들어간다.
전북 광역정신보건센터(이하 전북 센터)가 안 할머니의 상태를 파악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전북 진안군은 2011년에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이 75.5명으로 전국 시군구 268개(자치구가 아닌 곳 포함) 중 1위를 차지한 지역이다. 이에 전북도는 노인 자살 예방 대책을 세우고, 우선 진안군 5개 마을 주민의 자살 위험도를 파악하는 전수조사를 벌이는 등 지난해부터 적극적인 자살 예방 사업을 펼쳤다. 그 결과 진안군의 2012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1.8명으로 71.2%나 감소해 234위로 뚝 떨어졌다. 지난해 진안군의 전체 사망자 330명 중 자살 사망자는 6명에 그쳤다.
- 전북 진안군의 자살률은 2011년 전국 1위였다가 지난해 234위로 떨어졌다. 전북광역정신보건센터 직원들이 지난달 27일 진안군 정천면 월평리에서 자살에 쓰일 수 있는 폐농약병들을 수거해 정리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전북 센터는 자살 예방을 위해 폐농약도 수거한다. 쓰고 남은 농약을 자칫 자살 수단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27일 오후에도 정천면 5개 마을 논두렁에서 건져 올린 농약통이 약 400개나 됐다. 그중에는 독성 강한 제초제 '그라목손'도 있었다.
전북 센터 김성혜 부센터장은 "갈수록 노인 자살이 늘고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외로움'"이라고 말했다. 김 부센터장은 "특히 시골 노인들은 외로움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꾸준히 연락하면 '누군가 나를 보살펴준다'고 생각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이 크게 줄어든다"면서 "지난해 5월 '찾아가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대상자 중 자살자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