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초월하는 국내 토목기술 현장
입력 : 2013.10.11 03:08
전남 여수공항에서 자동차로 40여분 달리면 광양항 인근 여수 앞바다가 나옵니다. 1598년(선조 31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마지막으로 격퇴한 노량해전이 펼쳐졌던 곳입니다. 지금은 바다 한복판에 거북선 대신 거대한 콘크리트 탑 2개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올 1월 정식 개통한 ‘이순신 대교’입니다.
하루 평균 약 5만대의 차량이 오가는 이순신 대교는 세계적인 기록을 여럿 보유하고 있습니다. 서울 남산(262), 63빌딩(249)보다 높은 주탑(主塔·해발 270)은 전 세계 현수교(懸垂橋) 가운데 가장 높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탄생 연도인 1545년을 기념해 설계한 주탑과 주탑 간의 거리(1545)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순신 대교처럼 주탑과 주탑을 케이블로 연결하고 케이블에서 수직으로 늘어뜨린 강선(케이블)에 상판을 매다는 방식으로 지어진 교량을 현수교라고 부릅니다. 현수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골든 게이트 브리지)와 한국의 광안대교처럼 긴 다리에 교각이 거의 없어 외관미가 뛰어납니다.
- 이순신대교
이순신 대교는 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대림산업이 자체 개발한 기술과 장비만으로 세운 ‘한국형 현수교’라는 점에서 더 자랑스럽습니다. 6년여 연구끝에 세계 6번째 ‘현수교 기술 자립국’이 된 것이죠.
최근 국내 건설사들은 ‘저가·덤핑’ 수주를 벌이다 실적이 크게 악화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국내 건설사들의 토목 기술은 ‘세계 으뜸’에 손색이 없습니다.
◇와이어 길이만 7만2000㎞지구 두바퀴 돌아
‘이순신 대교’의 경우, 현수교의 핵심인 주탑과 주탑을 이어주고 다리 상판을 들어주는 케이블은 피아노 줄과 두께(5.35㎜)가 비슷한 강선(wire) 1만2800가닥을 촘촘하게 엮어 지었습니다. 다리 양쪽에 놓인 케이블 2개에 들어간 강선 길이(7만2000㎞)만 지구를 2바퀴 돌 수 있고, 4만의 무게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합니다.
케이블을 다리 양쪽 끝에서 잡아당기는 역할을 하는 앵커리지에도 ‘지중정착식’이라는 첨단 기법이 도입됐습니다. 지중정착식은 지하 33 아래에 있는 견고한 암반까지 구멍을 뚫어 케이블을 고정하는 방식으로, 콘크리트 사용량을 줄이는 친환경 공법입니다.
다리 상판(上板)에는 유선형의 비행기 날개 모양인 ‘트윈 스틸 박스(twin steel box)’ 방식이 국내 최초로 적용됐습니다. 상판 중간에 바람 길을 만들어 일체형 상판보다 무게가 5% 가볍고 A급 태풍의 2배에 맞먹는 초속 90의 강풍에도 끄떡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상판 포장도 고강도의 에폭시 아스팔트를 사용하면서 도로 두께가 80㎜에서 50㎜로 얇아져 다리 자체의 무게가 감소했고 케이블 직경과 앵커리지 크기도 모두 줄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터널 길이만 11㎞초당 1200㎥ 공기 유입
고속도로 터널 공사에도 인체공학과 첨단 IT부품을 복합적으로 접목시킬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대우건설이 작년 9월에 관통한 인제터널은 국내 최장(最長) 터널입니다. 현재 건설 중인 춘천~양양 간 고속도로(길이 88.8㎞) 구간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여러 산을 뚫고 지나가는 이 터널의 길이는 무려 10.96㎞나 됩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길었던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4.6㎞)보다 2배 이상 긴 터널이지요.
- 2011년 7월 25일 국내최장 도로터널이 될 인제터널의 작업현장에서 2016년 완공을 목표로 굴파기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인제터널은 강원도 내륙에서 동해쪽으로 1.95도씩 서서히 내려가도록 설계됐다. 그래서 터널의 시작과 끝부분의 높이가 200m나 차이 난다. 게다가 땅속 200~500m 아래에서 작업을 벌여야 하지만 11㎞ 길이의 터널오차는 2㎝보다 작아야 한다. 대우건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와 레이저를 이용한 측량기기로 지하 동굴 속 위치를 70m마다 측정, 표시하고 그 점을 하나씩 이어가는 방식으로 초대형 터널을 만들고 있다.
터널이 워낙 길다 보니 혹시라도 사고가 발생하면 자칫 대규모 인명 피해로 번질 수 있습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인제터널은 ‘고속도로는 직선으로 곧게 뻗는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10분 이상 달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속도를 높이거나 졸음운전을 할 수 있는 점을 감안해 도로를 S자(字) 모양으로 네 번 휘어지도록 설계한 것이지요. 동시에 일부 구간에는 천장에 LED(자체발광다이오드) 조명을 설치, 운전자가 마치 숲이나 바닷속을 직접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했습니다.
긴 터널 안에서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사고 후 30초 만에 이용자들이 모두 피할 수 있도록 57개의 대피통로를 만들고, 유조차 등에서 흘러나온 기름이나 화학물질을 분리·보관하는 맨홀도 설치됩니다.
◇바닷속 130 암반에 초대형 석유비축기
현대건설이 내년 5월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싱가포르 주룽(Jurong)섬 해저 석유비축기지 공사도 이런 점에서 주목됩니다. 해저 130 지하 암반 안에 147만㎥ 규모의 거대한 공간을 만드는 공사인데 한국 건설의 뛰어난 토목기술 능력이 발휘되는 현장입니다. 이 공사는 주룽섬 앞바다에 석유 약 925만 배럴을 보관하는 시설을 건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입니다.
해수면에서 100 이상 내려간 곳에서 공사가 이뤄지다 보니 이 프로젝트의 최대 장애물은 바닷물입니다. 암반 속에 스며든 바닷물이 작은 틈새를 타고 동굴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현대건설은 ‘그라우팅(grouting)’이라는 작업을 먼저 했습니다. 대형 드릴로 직경 4.5㎝의 작은 구멍을 15~20까지 깊게 뚫고 나서 시멘트를 주입, 주변 암반의 작은 틈새를 모두 채워넣는 것이지요. 현대건설은 “약 10바(bar) 정도의 수압을 이기려면 더 높은 압력(15~25바)으로 시멘트를 쏴야 한다”고 말합니다.
- 현대건설이 싱가포르 주롱섬 앞바다 130m 아래에 짓고 있는 해저 석유 비축기지 공사 현장. 석유 저장시설로 이용될 거대 동굴은 고속도로 왕복 4차로의 터널 크기와 비슷하다. 천장에는 지름 1m의 송풍관이 설치돼 지하 깊은 곳까지 맑은 공기를 공급한다.
석유 저장량이 30만급 초대형 유조선 5척과 맞먹을 정도로 크다 보니 비축기지 안에는 10여개의 터널이 들어섭니다. 이 많은 터널을 동시다발적으로 뚫다 보면 자칫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현대건설은 보완책으로 발파 작업으로 파낸 암반 벽면에 경화재를 섞은 콘크리트를 고압으로 뿌리는 ‘숏크리트(shotcrete)’ 작업을 택했습니다. 동시에 터널 천장과 벽에 5 길이의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볼트 20만개를 2~3 간격으로 촘촘히 박아 바위들을 잡아당겨 주는 ‘록볼트(rock bolt)’ 작업도 병행했고요.
◇1m당 공사비 8억원 세계적 건설사도 포기한 고난도 해안고속도로
같은 싱가포르에서 쌍용건설이 진행 중인 마리나 해안 고속도로(Marina Coastal Expressway)는 공사비가 1m당 8억원에 달합니다. 국내 고속도로 공사비(1m당 평균 1500만원)보다 50배 이상 비싸지요.
- 쌍용건설이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남단에 짓고 있는 지하 고속화도로 건설 현장 모습. 복잡하고 연약한 지질 구조에 지하 10차로 도로를 짓는 고난도 공사인 만큼 공사비가 도로 1m당 약 8억2000만원에 달한다.
총 연장 5㎞에 왕복 10차로(車路)로 지어지는 이 도로의 공사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싼 이유는 지반 침하와 침수 위험이 있는 매립지의 연약 지반에 짓는 만큼 고난도(高難度)의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2008년 당시 입찰에 참여했던 세계적인 건설사 8개 가운데 6곳이 중도에 포기할 정도였으니까요.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마리나 베이는 1970~80년대 두 차례에 걸쳐 바다를 메워 만든 매립지입니다. 또 두께 15m의 매립층 아래에는 뻘밭과 같은 점토층이 30m가까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공사에서는 지하 고속도로 건설에 앞서 해상 점토층을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지반 강화작업이 필수적입니다. 우선 쌍용건설은 대형 스크루(screw)와 고압 분사 방식으로 지하 15~30사이의 점토층에 27만의 시멘트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두께 10의 두터운 시멘트층을 만들었습니다. 즉 지하에 상암월드컵축구장 90여개를 1 높이로 채울 수 있는 초대형 시멘트 덩어리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토목 공사들은 깊은 산 속이나 사막, 바다 한가운데서 3~4년에 걸쳐 하루 24시간, 365일 일년 내내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싱가포르와 같은 열대 지역에서는 아침 7시만 되면, 기온이 이미 섭씨 30도를 웃돌아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흐릅니다.
하지만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글로벌 건설 시장에서 한국 건설사들은 특유의 고급 기술력과 인내심으로 한치의 오차 없이 공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건설사들이 해외에서 다시 한번 도약할 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