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유전 경기도문화재연구원장·前국립민속박물관관장
입구 벽돌을 뜯자 무덤 안에서 '쏴아'하며 흘러나온 하얀 수증기,
1450년간 밀폐된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왕릉발굴 소문에 구경꾼이 몰려 서두른 발굴
큰 유물만 건지고 나머진 쓸어 담았다…
하룻밤 새왕릉 발굴이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하나의 소망이 있다. 중국 진시황릉이나 이집트 파라오 무덤의 발굴처럼 세상을 놀라게 할 위대한 발굴을 자신의 손으로 해 봤으면 하는 꿈이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 공주의 무령왕릉 발굴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영광과 동시에 후회를 안겨 준 발굴이었다.
40여년 전인 1971년 7월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 충남 공주 송산리 백제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 도굴되었지만 광복 후 사적 제13호로 보호되어 왔다. 이 고분들 중에 사신도(四神圖)그림이 그려진 벽화 무덤이 있는데, 여름만 되면 벽면을 타고 벽화에 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보수 공사를 하던 중 한 인부가 우연히 벽돌 한 개를 찾아내면서 발굴이 시작됐다. 공사장 인부는 급히 삽질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한 유물이 나오면 즉시 박물관으로 연락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지막 백제인'을 자처하는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은 전날 묘한 꿈을 꿨다. 집채 크기의 돼지 같은 동물이 창문을 부수고 안방으로 달려 들어오는 내용이었다. 김 관장은 당시 이게 길몽인지 흉몽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오후 갑자기 송산리 고분 현장 소장으로부터 빨리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관장의 꿈은 길몽이었고 그건 바로 무령왕릉이란 걸 암시한 것이었다.
1971년 7월 7일 문화재관리국에 근무하던 나는 갑자기 공주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발굴조사단 10여명이 긴급히 구성됐다.
송산리 고분에 가니 웅덩이처럼 파인 곳이 있었고, 무덤의 입구를 가리키는 아치형 입구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벽돌들이 눈에 띄었다. "전축(벽돌)무덤이 틀림없어, 도굴 흔적이 없는 처녀분 같은데." 김원룡 단장은 흥분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소식이 전해졌는지 발굴현장 주변엔 기자들과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철야 작업을 해서라도 아치 입구의 바닥까지 파 내려가야 해요, 전돌(벽돌)을 들어내야 다음 작업을 할 수 있으니 모두 서둘러 주세요." 발굴단장의 지시가 내려졌다. 그런데 해질 무렵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호우로 변했다. 우리 발굴단은 무덤 내부로 물이 스며들까 봐 밤새 빗속에서 물길 트는 작업을 벌였다.
- ▲ 일러스트=김현국 기자 kal9080@chosun.com
새벽까지 계속되던 비가 그치면서 이튿날 아침 5시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삽날이 튕겨 나올 정도로 회로 잘 다져진 땅이어서 작업은 쉽지 않았다. 오후 늦게 고분 입구가 완연하게 드러나면서 조사원들도 들뜨기 시작했다.
막걸리와 수박, 북어 한 마리 놓고 간단한 위령제를 지냈다. 입구를 막아놓은 벽돌 한개를 뜯어내자, 갑자기 무덤 안에서 "쏴~아"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1450년간 밀폐된 고분 안에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나온 것이었다. "어 저게 뭐지?" 김 단장이 소리쳤다. 고분 안에는 기묘하게 생긴 돌짐승이 무덤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서 침입자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 단장과 공주관장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동전 꾸러미 위에 놓여 있는 지석(誌石)을 본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바로 백제 사마왕, 무령왕(재위기간 501~523) 부부의 무덤이었다. 백제의 수많은 고분 중에서 처음이자 지금껏 유일한 왕릉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무령왕의 무덤입니다. 왕과 왕비를 기록한 지석이 있고 도굴된 흔적이 전혀 없는 무덤입니다." 김 단장의 말에 모두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후 주변에선 여러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왕릉을 파헤치자 하늘이 노해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무덤 입구를 여는 순간, 무령왕의 영혼이 하얀 수증기가 되어 흘러나왔다." "바깥 공기 때문에 안에 있던 유물들이 금세 썩어버렸다." 기자들과 구경꾼들은 빨리 내부를 보여 달라고 아우성쳤고, 그 사이 구경꾼은 수백명을 헤아릴 정도로 몰려들었다.
발굴단은 사람들을 통제할 수단도 없었고 한동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무덤을 폐쇄한 뒤 내부 조사는 신중히 하자던 당초 결정도 흔들렸다. 기자와 구경꾼들이 몰려 있는 상태에서 조사를 더이상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러다간 큰일 나겠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론에 먼저 내부를 공개하고 수습에 들어갑시다." 하지만 언론에 내부를 공개하자, 구경꾼들도 덩달아 공개하라고 나섰다.
발굴단은 무덤 내부의 유물을 빨리 수습해야만 이런 분위기를 잠재울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서둘러 야간발굴을 강행했고, 이튿날 아침 9시까지 왕의 시신 머리에 씌웠던 금장식, 왕비의 베개, 은팔찌, 동거울, 중국 자기와 중국 돈 등 108종 4000여점을 찾아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큰 유물만 대충 위치를 표시하고, 나머지는 무덤 바닥에서 훑어내 꽃삽으로 쓸어 담았다. 하룻밤 새 왕릉 발굴이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왕릉에서 나온 유물들 덕에 백제의 역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됐지만 학술적인 자료를 얻을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유리구슬 수천 점이 나왔지만 이게 팔에 매단 것인지, 목에 건 것인지도 모르고 쓸어 담기에 바빴다. 당시 고분 안의 온도가 어떻게 됐는지 기초 조사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유물을 주워담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장비도 카메라가 1대 있었고, 야간발굴을 위한 발전기도 공주 군청에서 빌린 게 고작이었다.
고대 백제사의 비밀을 풀어줄 블랙박스 무령왕릉 발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왕릉을 단 하루 만에 발굴한 것은 어떤 후진국에서도 하지 않는 일이다. 당시 30세의 젊은 나이에 발굴 요원으로 참가한 것은 영광이었지만, 평생을 유적 발굴에 몸담아 온 나로서는 지금도 무령왕릉 얘기만 나오면 몸 둘 바를 모른다. 만약에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발견 당시의 실내공기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해 치밀한 조사계획을 세우고 모든 조사방법을 동원해 1년이든 2년이든 최선을 다할 텐데…. 나는 요즘도 발굴현장을 찾으면 후배들에게 후회 없는 조사를 부탁한다. 한번 실수한 발굴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