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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통화개혁...
수미심
2022. 5. 9. 14:39
1962년 6월 9일 오후.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이 발표된 지 5개월이 지난 때이다.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는 집에서 모처럼 토요일 오후를 한가히 즐기고 있었다.
곧 닥칠 풍파도 숨을 죽인 듯 나른한 오후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느닷없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만찬에 초대했다는 호출이었다.
황급히 장충동 의장공관으로 달려간 “의장께서 지금 최고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문에 있던 연락장교는 민 총재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회의실 주변은 삼엄한 경계가 펴져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몰려온 기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까지 무슨 일이 있는지 까맣게 몰랐던 민 총재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통화개혁?’
민병도가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 최고의원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정희 의장이 자리를 잡자
곧 재정경제분과위원 류원식(柳原植)이 일어섰다.
그가 꺼낸 것은 역시 통화개혁에 대한 제안 설명이다.
민 총재는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이 통화개혁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미 수뇌부에서 결정한 엄청난 사안에 이의란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실무 뒤치다꺼리치곤 너무나 막중한 책무만 주어졌을 따름이었다.
일국의 중앙은행 총재가 다음 날 0시를 기해 시행될 통화 개혁을
전날 저녁 발표 직전에 처음 듣게 되었다니.
이것이 1962년 통화개혁의 성격과 본질을 함축하고 있다.
다음 날 아침. 삼성 이병철을 비롯한 기업인들은 박정희 의장에게 불려갔다.
“어젯밤 뉴스 들었지요.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조달에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 단행한 것입니다. 워낙 극비리에 진행했기에
최고회의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박 의장은 이렇게 말문을 꺼내며 의견을 물었다.
기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통화 개혁이 잘못된 구상이라고 주장했다.
박 의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조치는 이미 철회될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1961년 12월 제정된 외국환관리법으로
한은법상의 외환업무와 외환 정책 관련 조항이 정부로 넘어갔다.
해외 부문의 통화관리를 컨트롤할 수 있는 손발이 묶여 버렸다.
결국 한은을 예속시키고 있는 독소조항들이 대부분 이때 만들어졌다.
한은법 개악을 해놓고도 재무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은행감독원까지 가져가기 위해 다시 한은법개정을 획책하고 있었다.
재무부는 1963년 3월 11일 한은법 개정안을 전격적으로 냈다.
이 개정안은 ‘현행 한국은행법상 금융정책에 관한 최종적인 권한과
책임이 정부에 귀속 되어 있으므로 은행감독권도 아울러 정부로 이관하고
이를 통하여 특수은행 증권업 보험업 신탁업을 포함한 광의의 전 금융기구에
대한 정부 감독의 일원화를 도모코자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민 총재는 취임하자마자 증권파동의 수습에 고초를 겪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통화개혁이라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채
뒷감당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는 부당한 정책 결정을
막고 한은의 무너지는 위상을 마지막까지 붙들고자 자리를 걸고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민병도 총재는 1963년 3월 22일 오전 한은 기자회견장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금융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화를 혁명정부가 민정 이양에 앞서 이루어
놓기를 바랍니다.” 민 총재는 기자회견을 끝내고 이날 오후
황종율 재무부 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의 회견 후 즉각 여론은 들끓었다,
은행감독원마저 차지하려던 재무부의 기도는 이에 꺾이게 되었다.